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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양심 / 요한복음 8:3-11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명절을 맞이하며 가족들이 모여서 정을 나누고 부모를 공경하는 좋은 전통을 이어갑니다. 현대사회에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좋은 전통들을 우리는 미풍양속이라고 부르며 소중히 여깁니다. 이와 비슷한 구분이 신앙 안에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배울 때에 가장 먼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삶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배우지만 그러나 우리는 꼭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선한 것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악한 것이 있다고 말할수 없다는 경험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는지 사람들 안에 있는 선한 모습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거룩한 존재이지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타락하였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신앙을 깊이 가질수록 인간의 의도와 생각 깊은 곳에도 이기적인 모습이 자리잡고 있고 인간 사회의 깊이 뿌리내리고 구조화된 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그리고 깨어진 이 세상에 최초에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손길의 자취들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진, 선, 미 그리고 인간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진리탐구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옳고 그름 분별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양심의 역할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와 같은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내 마음을 늘 새로움과 경외심과 놀라움으로 채우고 내 생각을 계속해서 사로잡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에서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며, 내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

동양에서도 예로부터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맹자는 그것을 사단(四端), 즉 네 가지 인간됨의 근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입니다. 맹자는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보았고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보았고 예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즉 사양할 줄 아는 마음으로, 지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옭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자체로 충분하게 스스로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선한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됨을 갖추지 못한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도 인간을 자연 상태 그대로 둘 수는 없기에 가르치고 깨달음을 전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심을 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양심의 가책이 나타나는 현장을 보여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고발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를 끌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까지도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대단한 은혜를 받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양심을 깨워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가진 선한 기능입니다.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로마서 2:14-15) 율법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의 양심이 스스로를 고발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게 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중요한 기능은 찔림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짓고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즉 자신의 피조물 됨을 아는 것이고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어 연약한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양심이라는 말을 영어로 콘션스(conscience)라고 하는데 이것은 라틴어인 콘스키엔티아(conscientia)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또 헬라어인 쉰에이데시스(syneidesis)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을 직역하면 “함께 아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안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목소리가 함께 나를 깨우쳐준다는 의미가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염치와 함께 공감하는 태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이런 연약함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연민을 느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그 여인을 정죄하던 손을 내려놓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자리를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조금 뒤집어보면 신앙에 의해서 양심이 왜곡되었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여인을 예수님께도 끌고 왔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하여”(6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영향력에 해를 끼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올무를 놓고 흠집을 내기 위해 이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율법을 지키게 되면 사적인 사형집행을 금지하는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고 로마의 법을 지키면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전문가였지만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그들이 배척하고자 하는 예수님에 대한 배제와 정죄와 고발의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이 죄를 범한 한 여인은 한 인격체로, 죄를 범하고 타락했지만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 보지 못하고 그들이 짜 놓은 각본을 완성시킬 도구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신앙은 양심을 깨우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이 도구화되어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로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교리적인 완고함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현실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 공감하는 능력을 깨뜨리고 일방적인 정죄와 저주만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억제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던 최초의 죄악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진리와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증대시키고 증오를 부추기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진실을 잃어버리고 양심의 가책이 없어 지어낸 거짓들을 전파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양심적 기준도 지키지 못하는 행위로 어떻게 정당성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진정성을 잃어버린 진리가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결국은 비난당하고 결국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선한 양심을 깨워주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모두가 부끄러움을 알고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부끄러움 속에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바른 신앙이 양심을 깨워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여기에 중요한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모두가 죄인임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용서를 받은 것은 예수님 발 앞에 남아있던 한 여인뿐이었습니다.

사실 그 여인도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닌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 자신의 손가락질을 어디서 피하겠습니까? 자신의 깨어지고 허물어진 인생을 어디서 회복하겠습니까? 누가 자기를 받아주겠습니까? 그 여인은 다른 어느 곳도 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 그저 예수님 앞에 머물러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용서를 받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은 우리의 부족함을 알게 하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양심의 짐을, 죄의 짐을 벗을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양심의 무딤이 문제가 되지만 때로는 극심한 양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앞을 떠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곧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은 다시 부끄러움을 모르고 예수님을 끝내 넘어뜨리고 정죄하며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바른 신앙은 우리의 양심을 깨우며 또한 바른 신앙은 우리가 어떻게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때 양심은 우리의 신앙의 디딤돌이 되어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남보기에 그럴듯할 때에는 교회에 나오다가 뭔가 삶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잘남을 과시하는 곳입니까? 신앙적인 기준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문제를 손가락질하려고 기다리는 곳입니까? 교회는 먼저 선한양심을 회복하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또한 다른 이들의 연약함에 대해 공감하며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함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 삶이 무너졌을 때, 내 머릿속에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먼저 생각나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주지 못하면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수 많은 모임들이 있는데 왜 교회가 또 하나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모임으로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선한 양심을 깨우치고 서로 서로 정죄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기고 서로의 짐을 함께 져주며 자신의 그럴싸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회복되고 은혜를 누리는 복된 교회, 복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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