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4(주일) 주일설교 요약

by ADMIN on Jun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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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가 너희의 신이라 / 열왕기상 12:25-30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그림동화책”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화책이 아니라 독일의 야콥 그림(Jacob Grimm)과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두 형제가 독일의 민담, 전설을 수집하여 만든 동화책의 이름입니다. 그 책 속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개구리왕자,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림 형제는 독일어 문법을 연구하던 언어학자였습니다.

19세기 초에 독일은 위기의 겪게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나폴레옹의 지도아래 강력한 힘을 가지고 독일을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독일은 여러 영주들의 영토로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무엇이 독일을 하나되게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림 형제는 이 시대에 독일인들이 공유하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독일어를 연구하면서 독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찾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그리스-로마 신화가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르쳐 졌지만 그림 형제는 독일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기 독일의 고유한 언어를 연구하고 독일어로 전해지는 민담들을 수집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독일의 민담을 찾아내고 더 나아가 고대 게르만족의 신화를 복원하는 작업과 함께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들은 이제 고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악극을 만들며 독일인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고유의 문화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현상일 것입니다. 특히나 열등감에 빠져있는 민족, 억압받던 민족이 자부심을 갖고 해방되어 자유를 찾는 과정은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우월감으로 변하고 이제는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규정하면서 열등한 민족에 대한 독일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인은 우월한데 저 열등한 유대인들이 독일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있기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선이 되고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이 만든 구약성경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시작하고 국민들은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구원자라고 칭송하면서 소박했던 언어학자들의 순수한 노력이 점점 비틀어져서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빚어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의 기원은 솔로몬의 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멀리 스바에까지 전파될 정도였지만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 단초는 솔로몬의 외교정책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나라의 번영을 지키고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무력이 아닌 혼인정책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와 여러 이웃나라의 공주들과 통혼을 하여 나라에 안정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공주들은 시집을 오면서 자신들의 우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솔로몬은 그들을 위해 우상들의 신전을 지어주게 되고 솔로몬의 왕비들은 솔로몬에게도 우상의 신전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제 솔로몬의 지혜는 올무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그 여인들의 요구를 거절하게 되면 기껏 이루어낸 평화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여로보암이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시대에 있었던 여러 공사들에서 인부들을 감독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선지자인 아히야를 만납니다. 그는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10지파를 맡기시겠다 하셨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솔로몬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기는커녕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고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북쪽의 10개 지파는 솔로몬을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이제는 노역에서 쉬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갈려나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고 여로보암을 불러들여서 왕으로 세웁니다.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여전히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하고 있는 것에 불안함을 느낍니다. 백성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면 자신은 껍데기만 왕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북이스라엘이 하나의 나라로서 성립하기 위해 국가적인 정체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남쪽의 벧엘과 북쪽의 단에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처음에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는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신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알과 같은 가나안의 신들처럼 황소를 타고 다니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되었기에 대신 송아지의 상을 만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법궤 위에도 그룹(Cherub)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천사의 상이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룹 천사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천사들이었기에 이 곳이 하나님의 보좌이며 하나님이 이 천사들 위에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이었습니다.

금송아지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고자 했지만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금송아지만 보였습니다. 이 금송아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이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다라는 뜻으로 바뀌게 되고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 대신에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은 솔로몬의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로보암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택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나라를 그의 집안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불안했습니다. 자기와 자기 백성들이 의지할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하였고 눈에 보이는 상징을 만들어서 새로운 나라의 구심점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불안해했을까요?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을까요?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잃을 것이 대한 두려움, 우리가 남쪽의 유다지파의 나라보다 강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증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대한 보증으로 종교적인 상징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보증으로 종교적인 상징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정치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화려한 신전은 신적인 권위로 국왕의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행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에 블레셋과 싸울 때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람들은 법궤를 전쟁터에 메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주장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법궤를 메고 간다고 따라가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곳에 법궤가 가고 그 법궤를 따라 행진하는 것이 광야생활 40년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게 되고 법궤까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필요한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불신앙이며 우상숭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을 지으셔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 구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을 더 원하고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와야 하는데 하나님을 끌어올 수가 없기에 대신에 다른 우상을 찾고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는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가르칩니다. (골로새서 3:5)

중세에는 부는 축복의 상징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1순위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성인들,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이 신앙의 표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부자들은 천국으로부터 멀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지만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부하고 선행을 베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성경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읽어내기 시작합니다. 부가 축복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의 모범은 순교자들이 아니라 신앙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되어버렸고 앞뒤가 바뀌어서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기 위해 신앙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재물이고 권력이고 명예인데 그것을 얻는 수단으로 누구는 교회를 가고 누구는 절에 간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같은 욕망이라는 하나의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바꾸고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도 언제든지 우상숭배자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 민족이 더 자부심을 얻기를 원했고 우리나라가 더 안정을 얻기를 원했고 우리 가정이 좀 더 재정적으로 안정을 얻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이 신앙을 앞서가는 순간에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우리의 신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국가가 종교가 되어버리고 재물이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내 마음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무엇 때문에 만족합니까? 무엇이 없어서 불안해 하고 무엇을 보면서 만족을 느낍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의 끝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우리를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진정한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든지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늘 우리를 결핍한 존재로 만들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욕망의 실현을 위한 대가를 무한정으로 요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지 못해서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모든 유혹과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어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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