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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사람의 말 / 창세기 9:18-27

창세기는 만물의 시작에 대한 책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시작이 되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인류 전체의 공통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원역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원이 되는 역사라는 뜻입니다. 

이 원역사의 큰 흐름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이 아름답게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후에 인간의 죄악으로 타락이 시작됩니다. 죄악이 이 세상에 퍼져나가자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셨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노아로부터 이 세상은 새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이 있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뒤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인간들이 교만하여 서로 힘을 합쳐서 하늘까지 닿도록 높이 탑을 쌓으려다가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결국 인간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원역사의 이야기이고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서로 다투면서 갈등을 빚어가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흩어져서 살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시기가 바로 홍수 이후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던 완전하게 조화로웠던 시대와도 다르고 그렇다고 홍수 이전에 하나님이 노하셔서 심판하셨던 시대와도 다릅니다. 특별히 창세기 8장과 9장은 홍수 이후의 시대가 그 이전의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여러 가지로 보여줍니다. 홍수의 심판은 이 세상을 타락하기 이전으로 근본적으로 돌려놓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성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오직 채소와 나무의 열매만을 먹도록 허락하셨지만 홍수 이후에는 다른 동물들을 잡아서 먹는 것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그만큼 척박해졌고 인간들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가 태초의 조화와 평화가 깨어지고 서로 생존을 위해 다투는 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홍수 이후의 시대는 극단적인 죄악은 심판으로 정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며 이 세상도 하나님이 지으신 태초의 조화와 평화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까지 이러한 인간과 세상의 기본적인 조건들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홍수 이후의 시대에 일어났던 매우 특이하면서도 난해하고 상징적인 사건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시작은 노아의 가족들을 다시 소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들로부터 이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래서 노아의 아들들의 자손들이 이 세상에 다시 퍼져나가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계보를 보면 셈에게서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나오게 되었는데 셈은 지금의 이스라엘와 그 동편지역에 주로 자리를 잡았고 야벳은 그로부터 서북쪽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함의 자손들은 셈의 자손들이 사는 곳을 빙 두르듯이 남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퍼져있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이 어디로 퍼져갔는지는 창세기 10장의 족보를 통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흔히 셈은 동양사람, 야벳은 서양사람, 함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함에 대해서 그러한데 창세기 10장을 보면 함에게는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라는 네 아들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구스는 에디오피아, 미스라임은 이집트, 붓은 리비아이고 가나안은 바로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 즉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스의 자손 중에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바벨론과 앗수르로 뻗어나가는 나라를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함의 자손들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되고 주로 접촉하게 되는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앗수르와 바벨론이 모두 함의 자손들에 대한 설명 가운데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의 핵심은 세 아들의 자손들이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됩니다. 노아가 농사를 짓고 포도나무를 심는 것은 홍수 이후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상의 삶이 회복이 되고 또 발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포도나무를 심어서 포도열매를 거두고는 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시고 너무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런 노아의 모습을 보면 홍수가 있기 이전에 타락했던 세상에서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까지 불렸던 노아의 모습과는 달리 단정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이러한 모습은 앞에서 말씀드린 홍수 이후의 삶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연약함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표지에도 노아가 술에 취해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실어 놓았는데 화가들이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수많은 그림들이 이 장면을 소재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림들은 너무 민망해서 차마 주보의 표지로 실을 수가 없어서 그나마 좀 젊잖은 것을 골라서 실어 놓은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뭔가 영웅의 흠집을 내는 것을 좋아하기에 술취한 노아만큼 그런 인간들의 마음에 부합하는 주제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그린 수 많은 그림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왜 노아가 술에 취해서 이렇게 정신없이 벌거벗고 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홍수의 심판을 겪은 노아가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서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려지고 자기 가족들만 남은 세상에서 그 적막감과 공허함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경이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어찌되었건 이 장면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노아의 아들들이 보기에도 매우 민망했던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노아의 아들들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먼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함은 노아가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형제들에게 알립니다. 여기서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는 것은 흉을 보고 조롱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 곧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이 성경에 나오는 본문들 중에서 가장 효행의 모범을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절정은 노아가 술이 깬 후에 일어납니다. 이 대목이 참 중요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데 먼저 무슨 방구뀐놈이 성낸다고 자기가 술에 취해서 그야말로 체통을 잃고 벌거벗은 채 쓰러져 잔 것이 챙피해서 더 그랬는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향해서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하지만 또한 함에게는 저주를 합니다. 그런데 함이 아버지를 흉을 본 것도 잘못이지만 술취해서 자던 노아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결국 누군가가, 아마도 셈이나 야벳이 함이 한 일과 자신들이 한 일을 이야기해주엇을 것 같은데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뭐 그렇게 별로 좋은 일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셈과 야벳이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굳이 함이 잘못한 것까지 고자질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후대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함을 아프리카 사람들, 즉 흑인들의 조상이라고 보고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노아의 말을 가지고 그러므로 흑인들은 본래 노예로 태어났다며 노예 제도를 정당화해 온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이 벌어졌을 때에 많은 노예주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노예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주장을 했고 흑인들은 본래 노예로 태어난 것이라며 노예제도를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여기서도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가나안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노아 할아버지가 벌거벗고 자는 것을 먼저 발견한 것이 가나안이고 가나안이 자기 아버지 함에게 알렸고 그래서 함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함의 아들들 중의 하나의 이름이며 또한 앞으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는 땅의 이름이 됩니다. 즉 가나안은 가나안 족속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므로 가나안은 그의 형제의 종이 되고 특히 셈의 종이 된다는 것은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성경 속의 맥락과 상관없이 끌어다가 사용하면서 왜곡하게 되는 것은 성경을 잘못해석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며 창세기의 처음에서부터 이 사건의 앞에까지는 인간을 축복하고 저주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인간들이, 특히 아버지들이 자기의 자손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노아입니다. 노아가 자녀들을 향해 축복하고 또 저주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도 앞에서 말씀드린 홍수 이후의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인간들의 사이가 이전보다 더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들의 사이에서 부모들이, 스승들이, 지도자들이, 권세자들이, 어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축복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고 잡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이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사이에서 인간의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끼어들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들, 스승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영향력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격려해주고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고 바른 길을 이끌어 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잘못 사용하여서 편애하고 그릇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의 삶에, 또 누군가의 삶에 어두운 그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권세를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한과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자녀들, 우리의 제자들, 우리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우리가 어떤 기여를 하고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들이 자녀들을 축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처럼 저주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충돌하게 될 때에, 그들을 이해하고 품어주기 보다 오히려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녀들의 마음 속에 부모의 존재가 원망스러운 존재가 되고 그들의 삶에 한계를 지우고 원하는 것을 좌절시키고 상처를 주는 그런 존재로서 자리잡고 있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본문을 노아의 아들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러한 현실 속에서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는 앞 세대의 부채와 자산, 축복과 저주를 모두 떠안고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자유롭게 내 삶을 개척해가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질머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짐을 지고 앞 세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제 다 끝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고난의 길을 가야 했고 모압 여인인 룻이나 가나안 여인인 라합과 같이 이방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복을 함께 받게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저주하는 책이 아니라 축복하고 구원하는 책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죄의 그림자를 드리운채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죄악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아래에서 모든 저주, 정죄, 심판은 깨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가 암송하는 말씀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입니다. 2020년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권세와 또한 우리에게 지워진 짐, 두가지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서 교만하지 않고, 또 좌절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이 세상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깨달으며, 또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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