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주일) 주일설교 요약

by ADMIN on Feb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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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일생 / 창세기 23:1-6

지난 주에는 롯의 일생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사라의 일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롯도 아브라함의 조카로 성경에 등장하고 사라도 아브라함의 아내로 등장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일종의 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연은 주연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조연 또한 조연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중동에서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이 어떠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여러 가지 불편한 이야기들을 보게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결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인식과 구분이라든가 여러 가지 금기시되는 사항들이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여성들에 대한 성경의 관점도 대부분 여성들은 돕는 베필로 조연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고 때로는 부정한 존재로 취급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의 수를 계수할 때에 포함시키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본문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성경 말씀을 확신있게 선포하기 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그게 꼭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하면서 변명과 핑계거리를 찾아야 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갈 때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분명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에 여성들에 대해 차별적인 표현들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늘날의 관점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이 된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날 가지게 된 평등의 관점이라는 것의 기원 또한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사회의 어떤 신화나 경전들과 다르게 인간의 창조와 관련하여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들을 만드셨으며 또한 그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때로는 여성 차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라고 선언함으로 복음이 우리의 삶에 주는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삶에 규범으로 삼고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어떤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떠어떠한 본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경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식사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오는데 식사할 때 특히 신약시대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한 쪽으로 기대어 누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성경을 읽으실 때에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그냥 앉아서라고 되어 있지만 각주가 달려서 “기대어 누어서”라고 되어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에 누워서 먹으면 소가 된다고 배웠는데, 그래서 누워서 먹으면 안되는데 유대인들은 완전히 누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쪽으로 기대서 누워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화를 남겼지만 사실 그 작품은 최후의 만찬 후의 기념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기대어 누워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요즘 제작되는 영화들이나 그림들은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 작품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식사할 때에 기대어 누워서 먹는다고 했다고 해서 성경적으로 식사하는 것이 기대어 누워서 먹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문화이기에 그런 것이지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평일에는 면도를 잘 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고 뭔가 한가지 생각을 하면 다른 일든 잘 생각하지 못하는 모지란 면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 머리숱이 비다보니까 허전해서 그냥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왜 면도를 안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농담반 진담만 이렇게 정색을 하고 질문을 해봅니다. “그럼 예수님이 면도하신 것 보셨습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하도 예수님을 닮은 구석이 없어서 그거라도 닮아보려고 면도를 안한다고 말입니다. 

그냥 좀 우스운 이야기지요.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장이나 외모를 닮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당시의 문화 아래에서 사셨기에 그 당시 문화에 따른 겉모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경도 당시의 문화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성경이 이이 전해주는 외양, 외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 핵심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노예제도도 있었고 여성들도 지금보다 더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시대에도 노예들, 종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신분으로 세습되어 영속되는 제도로서의 노예제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에도 종들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를 이야기했고 특히나 신약성경 중에 빌레몬서와 같은 책은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형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도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문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은혜와 자유의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유대인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고 어떤 고대사회의 전통으로 오늘날에도 따르고 답습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중의 하나는 요한계시록 21장 3절과 4절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장면이 앞으로 되어질 일,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일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장면이고 성경의 목적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고 사람들을 애통하게 하는 일, 곡하게 하는 일, 아프게 하는 일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서 저는 이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를 세우실 때에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런 공동체를 하나 더 이 세상에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넘치는 그러한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 가운데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사라도 그 시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라는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라도 그 시대의 딸로서 그 시대의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 시대에 지워지는 짐을 지고 살았지만 그러나 사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믿음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선포하는 축복의 역사였고 사라는 그 믿음의 전달자로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라의 일생에 대해 오늘 중요한 사건들 몇가지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먼저 사라의 출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유일한 정보는 아브라함의 말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뒤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빼앗길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비멜렉이 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했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이 사실 사라는 내 이복누이이기 때문에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궁색하게 변명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하자면 사라는 아브라함과 같은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성경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에서나 아브라함의 형제들에 대한 기록에서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다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로부터 성경에 등장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땅으로 이주할 때에 함께 가는 것으로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둔 소유와 얻은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래는 아브라함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아내니까 당연히 같이 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또한 사라로서는 남편의 신앙을 따라서 낯선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또 다른 모험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사라는 무엇을 믿은 것일까요? 

예전에 대학부 시절에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공부 할 때에 중요한 관심이 되었던 본문 중에 하나가 에베소서에 있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자매들이 “남편이 주님만 같으면 주께 하듯 할 수 있죠”라고 대답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만큼 존경을 받을만한 존재이면 그렇게 대우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느냐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힘겨운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믿을 수 있지만 아브라함을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따라간 것이지만 사라로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을 듣고 따라간 것이기에 사실은 더 큰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그녀가 겪었어야 할 혼란은 더욱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미 요즘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한참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진행이 될 때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 선교사의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남편은 사명을 받아서 갔다고 하는데 아내와 자녀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예전에 연변에서 사역을 할때에 의료선교를 하시는 분들이 오셨는데 그 중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연변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해주셨는데 그러면서 저와 잠시 이야기할 때 해주신 말씀이 사모님들 중에서 심각한 상태에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변이 더욱 더 특별한 곳이기는 했지만 크게 보았을 때에 남성 선교사가 가정을 이끌고 사역지로 간다고 할 때에 가장 큰 결단은 그 선교사가 한 것같지만 막상 선교지에서 현지의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감당하고 적응을 하는 몫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사역지로 가는 선교사의 결단은 많은 관심을 받아도 그 가족들의 고통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앙이 좋아서 예수 잘믿는 남자를 만나서 사모가 되고 선교사가 된 분들은 불만이 있고 힘이 들어도 그런 것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 문제가 더 심각해 지기도 합니다. 

제 친구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캄보디아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아내가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아내가 계속해서 직장에서 일을 해야 자녀들도 공부를 할 수가 있고 자신도 사역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정이 되어서 가족들과 떨어져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남은 사모님이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 세명을 혼자 돌보면서 직장일을 하면서  남편의 사역까지 후원을 해야 하게 된 것인데 한 두해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사역이 진행되면서 참으로 인간적으로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니까 힘든 것을 표현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감당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더 이상 이렇게 지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서 제 친구 목사가 다시 돌아와서 한국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당연히 사라도 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행간에 감춰진 이야기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라가 믿고 따라가야 했던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렇게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멀고 실체가 없는 것이었고 당장 가나안 땅에서 하루 하루 버티고 사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기근이 들어서 그 땅을 떠나야 했던 때고 있고 그럴때마다 또 다른 낯선 곳에서 찾아오는 위협들을 감당해 내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때 마다 그 위협을 함께 감당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더 치명적인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은 사라였습니다. 

성경은 두 번이나 아브라함이 피난처로 삼은 곳에서 아내를 빼앗길뻔 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왕이, 그랄의 왕이 자기를 데려갈 때에 남편이라는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고는 사라에게 자기 아내라고 말하지 말로 누이라고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만 자기는 힘이 없어서 아내를 지킬 수는 없으니 아내를 데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자기를 남편이라고 말하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제발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말해달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사라의 입장에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이 사람을 믿고 지금 가나안 땅까지, 또 애굽땅까지 왔는데 정말 한심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성경은 결국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 가정을 지켜 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사라도 사라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과 가정을 지키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은 자주 보여주지만 언제부터 사라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사라는 사라대로 또 자신의 믿음의 여정을 가는 인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한번은 외할머니의 젊었을 적의 고우신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할머니도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있으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그런 이야기는 말로 꺼내지도 못하는 시절이라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게 할머니는 언제나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는 것이 매우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소중한 인생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현실이 어렵고 무겁고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드러내어 성취하는 것이 위대한 만큼 또한 삶의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며 감당하기 힘겨운 것을 감당하며 그 자리를 지키며 흘리는 땀방울과 눈물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성취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또 다른 삶의 여정의 흔적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원래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아버지로서,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를 축복하시고 세워주실 대에 사라의 이름도 원래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주시면서 열국의 어머니로서 사라를 축복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였기에 당연히 받게 된 칭호이며 영광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감당해야 했던 사라의 믿음과 희생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며 사라는 사라라는 개별적인 믿음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라가 아브라함과 함께 한 127년의 인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한 사람 밖에 없는 믿음의 동반자였습니다. 이제 사라를 떠나보게게 될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땅을 사서 그 곳에 사라를 장사를 지내려고 그 지역의 유지들과 만나는 장면을 봅니다. 오늘 함께 보신 본문까지에서는 아브라함이 살던 지역의 유지들이 자신들이 가진 묘지를 그냥 사용하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브론 지역에 있는 막벨라굴을 다 값을 치르고 사서 그곳에 사라를 장사를 지내고 나중에 그와 그의 자손들도 그곳에 묻히게 됩니다. 가나안 땅으로 올 때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이끌고 왔지만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는 사라가 먼저 갔고 그 뒤를 아브라함이 따라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는 그 시대의 딸로 태어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로, 이삭의 어머니로서 그에게 지워진 짐 속에서 그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믿음의 힘겨운 경주를 아브라함과 함께 이루어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그의 믿음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사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던 믿음의 모범을 보여준 믿음의 선진들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또 사라의 믿음을 따라 각자 이 세상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또한 특별히 이 세상의 모든 딸들, 어머니들, 아내들, 누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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