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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일생 / 창세기 26:17-22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족장들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이며 또한 믿음의 기초가 놓여지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삭입니다. 일단 분량 면에서도 가장 적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드라마틱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믿음의 조상으로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르심을 받아서 당시에 번성하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까지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믿음의 길을 개척했던 사람입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신앙과 욕망이 묘하게 결합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결코 놓지지 않으려는 집념을 가지고 스스로 고생길을 자초했던 사람이었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이에 끼인 것 같은 사람이 바로 이삭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삭의 이야기의 전반부는 사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그의 아들 야곱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처럼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 잠깐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아니고 야곱의 이야기도 아닌 이삭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삭은 신앙의 제2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을 시험에 들기도 하며 인내하며  기도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삭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찾기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서 이미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믿음의 백성의 증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증명하는 증표로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할례를 주었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제물로 삼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일은,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만을 보시고 실제로는 이삭 대신에 한 숫양을 바치게 하시기는 했지만, 그러한 경험은 이삭의 일생에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삭은 그 후에도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가 갔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만큼이나 사라의 믿음도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이삭도 또 다른 면에서 놀라운 믿음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긍정적이고 수용적이고 순종적인 성품과 믿음의 주인공이 이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이삭의 배우자를 정하는 면에 있어서도 그의 아들인 야곱의 경우는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7년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삭은 전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지 않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우물을 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 그런데 다른 족속들의 시기로 다시 메워졌던 우물을 다시 팝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인데 이삭이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보면 긍정적이고 순종적이고 수용적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그래서 새로운 모험을 하거나 안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수동적이고 안정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그의 두 아들 중에서 당연히 그는 먼저 태어난 에서를 장자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뜻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려는 것이었지만 이삭은 그렇게 집안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에서에게 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역사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장본인이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어떤 성품이나 기질이나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면과 방해가 되는 면이 있습니다. 보통은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기질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열정적인 신앙의 상징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열정은 언젠가는 식어지게 되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신앙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게 될 때에 진정한 신앙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일상의 평범함 속에 안주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역사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그러므로 자신의 성품과 기질을 다스려가며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욱 온전한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의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의 일생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이야기, 이삭의 기질과 성품이 신앙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게 되었던 장면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앞에서 이삭의 일생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이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었을 때에 애굽이나 그랄 땅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둘러대었던 일이 있었는데 이삭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삭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먹을 것을 구해서 그랄 땅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좀 다른 것은 그랄 왕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갔다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그 여인이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좀 더 로맨틱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말하고 다니다가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나름 애정표현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랄 왕이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창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아마도 왕이 리브가에게 관심이 생겨서 기웃기웃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장면을 보고는 이삭을 불러서 왜 거짓말을 했는지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삭의 아내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을 내립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시대의 그랄 왕도 아비멜렉이라고 나오고 이삭 시대의 그랄 왕도 아비멜렉이라고 나옵니다. 물론 동일 인물일 수도 있지만 수십년의 시간이 지난 후로 보이기 때문에 일종의 헨리 1세, 헨리 2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처럼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또 아비멜렉이라는 말의 의미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왕들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이 되었거나 혹은 왕을 부르는 별칭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이 낯선 곳에서 이삭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원하시면서 이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성경에는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백 배나 되는 수확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남의 땅에 거하면서 이삭이 큰 부를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그 지역의 주민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랄의 왕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그 땅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주하면서 자리를 잡는 곳마다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미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서 거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그 기억을 더듬어서 예전에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던 곳을 찾아 당시에 메워져 있던 우물을 다시 파게 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을 연구하시는 목사님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지역에는 건조해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고학 조사를 할 때에도 어느 지역에 물을 얻을 수가 있으면 지금은 마을이 없어도 과거에 그 지역에 마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탐사를 하고 땅을 파보면 유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가 이삭으로서도 다른 곳에서 물을 찾기 보다는 예전에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던 곳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었고 또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에서도 물이 나오는 곳이 몇군데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몰랐던 물이 나오는 곳을 이삭이 찾아내니까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무슨 지도가 있거나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유목을 하는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양떼, 소떼를 치기 때문에 이 땅이 누구의 땅인지, 이 우물에 누구의 연고권이 있는지는 목소리 큰 사람이 우기기에 좋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그래서 세 번이나 옮겨가게 됩니다. 처음에 우물을 팠다가 그랄 땅의 목자들이 몰려와서 내놓으라고 하니까 양보하고 가면서 우물 이름을 다툼이라는 의미의 에섹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는데 또 몰려와서 내놓으라고 하니까 대적한다는 의미로 싯나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나서 더 멀리 가서 우물을 팠는데 거기까지는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았고 이제는 그 사람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넓은 땅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땅이 넓다는 의미로 르호봇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땅은 넓고 우물은 또 파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아등바등 다투고 살지 말고 달라면 주고 내가 양보하면 되는 것이라는 이삭의 인생 철학이 담긴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앞에서 이삭이 크게 부자가 되었을 때에는 시기하고 갈등이 벌어지고 그래서 그 땅을 떠나라고 그랄 왕이 말을 했는데 이렇게 이삭이 거듭해서 양보를 하면서 멀리 떠나가니까 이제는 오히려 다시 이삭을 찾아와서 화친을 맺자고 말합니다. 오늘 함께 보신 본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그랄 왕이 찾아오니까 이삭이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러니까 그랄 왕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다른 말로 하자면 이삭이 큰 부자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삭이 거듭 거듭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아서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신 사람이라고, 이 사람을 우리가 힘들게 해서는 큰일 나겠고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내가 복을 받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간의 갈등을 씻고 이삭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화해하고 서로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쉽게 말하면 이삭이 양보해서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양보라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운전을 할 때마다 묘한 모순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끼어들기를 하려고 하면 차들이 잘 비켜주지 않을 때에 불쾌감을 느낍니다. 분명히 깜빡이를 미리 켜고 충분한 공간이 있고 뒤에 차가 꽤 떨어져있다고 생각해서 옆 차선으로 들어가는데도 뒤에 오는 차가 오히려 속도를 더 내고 하이빔을 켜고 클락션을 울리면서 들어오지 말라고 할 때에는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뒤에 제가 운전하는데 누군가가 끼어들려고 하면 나도 갈길이 바쁜데 앞차랑 조금 거리가 벌어졌다고 위험하게 그 사이라고 끼어들어오냐고 또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끼어들려고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클라션을 빵빵 울리고 속도를 내어서 끼어들기 전에 먼저 지나가려고 합니다. 

아니 역지사지라는 말도 있는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바로 얼마전에 상황하고 입장이 바뀌었으면 서로 이해해줄만도 한데 그정도의 이해와 양보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끼어드는 것은 늘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은 늘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끼어드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고 내가 남이 끼어드는 것을 방해할 때에는 그 사람이 배려가 없이 운전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럴 때면 참으로 희한하게도 이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양 쪽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예전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판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연고가 있는 것이고 소유권도 일정부분 주장할 수 있는 정당한 행위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랄 땅의 목자들 입장에서는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어찌되었건 그 지역도 자신들이 양떼를 몰고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이삭은 말이 좋아서 양보이지 어쩌면 목자들의 위협을 받아서, 물러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러나면서 이삭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 모습을 통해 오히려 그랄 왕에게도 감화를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양보가 어려운 것은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선 포기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옳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내가 정당하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옳은 것인데 내가 양보하고 물러서게 되면 정의가 무너지게 되고 진리가 후퇴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가 양보한다고 상대방이 그것을 늘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는 양보한 것인데 상대방은 내가 잘못을 인정한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건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보라는 것은 일종의 거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내가 양보한 만큼 상대방도 그것을 알아주고 다른 영역에서는 양보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인데 그만한 이해심이 없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사실은 양보하지 않은 만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극한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사회전체적으로도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키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말하지요 누가 좀 양보를 하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 상황에 되었을 때에 과연 자신의 입장에서 물러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양보만이 최대의 미덕이라면 순교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다툼과 갈등이 있는 곳에서 겉으로는 여러 가지 거창한 명분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차분하게 좀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양보할 수 없고 무조건 우리의 입장을 사수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에 양보 자체가 우리가 주장하는 신앙의 가치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해관계의 면에서는 양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진리의 면에서 우리는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붙들고 주장하는 진리, 우리가 주장하는 가치 속에는 바로 사랑의 가치, 용서의 가치, 평화의 가치, 양보와 배려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용서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손해가 되더라도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또 친히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로 그 길을 따라가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고 나서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차지했습니다.  그 때에 아무래도 세상이 어수선하니까 도둑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곳곳을 다니면서 “도난방지(盜難防止)”라고 써붙였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말로도 일본말이랑 어순이 비슷해서 도난방지라고 쓰면 도난을 방지하자라는 뜻이 되지만 중국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난방지는 도(盜), 도둑은, 난(難), 어렵다, 방지(防止), 막는 것이, 즉 도둑은 막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둑잡는 것이 쉽지 않을 수는 있지만 도둑을 잡아야 하는 경찰들이 도처에 도둑은 잡기 어렵다고 써붙이고 다니니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없고, 다 배려하고 양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해야 할 터인데 교회가 나서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용서와 사랑과 이해와 양보와 배려의 가치를 부정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마치 도둑을 잡아야 하는 경찰이 도둑은 원래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같이 세상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거듭해서 양보한 것은 그가 원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의 이웃들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양보의 가치를 알아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몰염치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안에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양보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고, 또한 용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베풂을 통해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믿음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배려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했듯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내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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