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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신비 / 마가복음 14:22-2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을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말씀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부터 부활절까지의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종려주일 마다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1년에 네 번 성찬식을 해왔는데 그 중에 한번은 종려주일에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찬식이 없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한편으로는 함께 떡과 잔을 나눌 때에 불가피한 접촉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성찬은 성도님들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을 때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 본문이 예수님께서 첫 번째 성찬식을 갖고 성찬예식을 제정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찬예식이 없는 대신에 성찬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정리하고 생겨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성도들이 회개하고 믿음과 행실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 시행하는 조치들을 권징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discipline이하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수찬정지입니다. 즉 성찬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이라는 소중한 은혜의 자리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던 은혜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며 회개하고 정화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모임들을 자제하고 있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정부에서 권고사항을 주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누가 강요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서로서로 배려하고 또 지역사회를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리들 스스로가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자꾸만 교회를 보고 뭐라고들 하니까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또 교회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다른 여러 나라들은 최소한의 공공기관 외에는 모든 모임과 활동을 금지하고, 마트에 가거나 은행에 가는 것 외에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모든 이동을 금지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비교적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게 하고 이동하고 모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 그 대신 위험사례가 많이 발생했다고 판단된 모임이나 단체를 선별적으로 집중 관리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가 자유를 제약을 받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은 좀 더 폭넓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아량을 가지고 생각하면 우리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안전함과 자유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우리가 예배와 모임을 자제하는 동안에 과연 그동안 우리가 드리던 성찬과 예배는, 우리가 나누던 교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는가를 반성하며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다시 느끼고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시간을 갖게 될 때에 당연한 뜻 드리고 누렸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게 되고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찬예식을 제정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원래 예수님이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시던 그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의 자리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구원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떡을 나눠주시면서 이 떡이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잔을 나눠주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구원의 사건을 회상하는 유월절 식사를 이제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예비하시는 자리로 바꾸셨고 앞으로 우리가 성찬예식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과 은혜를 기억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예식을 제정하신 이래로 성찬은 초대교회의 예배의 핵심이며 절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시켜 주며 복음의 진리를 눈에 보이도록 경험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의 예배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46절과 47절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는데 말씀을 배우는 것, 찬송하는 것, 기도하는 것, 교제하는 것 그리고 떡을 떼는 것입니다. 떡을 떼는 것이 바로 성찬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수님께서 처음 성찬을 제정하시던 자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빵과 포도주는 한 끼의 식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식사와 성찬이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겸하게 되니까 누구는 많이 먹고 누구는 적게 먹고 하면서 성찬의 본래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서 점차 식사하며 교제하는 것을 우리가 애찬이라고 번역하는 아가페라고 부르면서 성찬과 구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대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먼저는 말씀의 전례인데 이 시간은 설교가 중심이 되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드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성찬의 전례의 시간을 갖는데 이 시간에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참여할 수가 없고 세례교인들만이 모여서 성찬예식을 가졌습니다. 

성경 외에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자료로서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를 전해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지도자이면서 후에 순교자가 된 유스티누스라는 사람이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변호하면서 쓴 글의 일부입니다.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오해하고 있고 그래서 박해가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로마 황제에게 직접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예배와 관련된 부분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일요일에 도시나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훌륭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그다음에는 모두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삶과 행동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또 그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우리는 서로 입맞춤을 합니다.

다음에 형제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줍니다. 그 사람은 이것을 받아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우리가 이 선물들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선택된 데 대하여 정성껏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이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러면 부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든 참석자들에게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그곳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가져다 줍니다. 

여유도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사에 따라 헌금하고 헌금은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이 보관하며 고아나 과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갇힌 사람들, 타국에서 온 나그네들 등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우리가 모이는 날은 한 주간의 첫째 날입니다. 그날 하나님이 세상과 빛을 지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배의 모습과 연속성을 가지면서 좀 더 구체화된 내용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말씀과 성찬이 예배의 두 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에 예배의 의미가 변질되면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이나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찬이 모두 예배의 핵심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설교를 강조한 것은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말씀이 없이 성찬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형식이 되어 버리고 또한 당시에는 무슨 마법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하는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사바”에 해당되는 말 중 하나로 서양에서는 호커스 포커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쓰이는 말인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것이 중세의 성찬식에서 사용되던 라틴어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인 “이것은 내 몸이다”를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hoc est corpus meum)”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일반 성도들은 사람들이 라틴어가 뭔지 모르면서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보기에는 그냥 빵인데 신부가 호크 어쩌구 하고 나서 이것이 이제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고 하니까 신기한 마술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흉내내기 시작한 것이 호커스 포커스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에서 말씀이 사라지고 형식과 겉모양만 남게 되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성포되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은 성경에 근거로 가톨릭교회의 모든 예식들을 재점검해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전통과 예식들을 다 폐지했지만 성찬과 세례는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찬과 세례를 포함한 성례가 설교와 함께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개신교 예배에서는 설교가 중심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고 성찬은 특별한 날에 하는 행사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1년에 네 차례 성찬예식을 가져 왔습니다. 더 자주 갖는 것도 좋겠지만 성찬이 가지는 의미를 새겨보지 못하고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의례가 되는 것도 성찬의 가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자주 가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성찬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은 눈에 보이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예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예배는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여드리는 헌신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자리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예배의 중심에 놓을 때에 우리는 바르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본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예배드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말에서 본다는 것이 꼭 구경꾼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본다고 할 때에는 시험지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시험문제를 푸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 구경꾼이 되고, 평가자, 판단자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온라인예배가 활성화되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공동체와 헌신의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과연 같은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정성과 헌신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물론 이것은 공간의 문제는 아닙니다. 같은 공간에 모인다고 해도 같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같은 시간에 뉴스를 보는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내용, 같은 프로그램, 같은 콘텐츠를 본다는 것만으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뜩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같은 것을 보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국가대항 경기를 볼 때입니다. 어떤 사람든 비행기값을 지불하고 현장에서 경기를 보고 어떤 사람은 광장이나 거리에 모여서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경기를 보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선수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경기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고 스크린 앞에서 열광을 하며 우리의 감정과 열정을 나타냅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든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얻은 구원과 승리를 함께 기뻐하고 찬양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단지 어떤 컨텐츠를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여하고 헌신하는 예배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개신교에서도 성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사이버 시대에 온라인으로 설교는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성찬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회의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또 바로 이렇게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다가오면서 온라인예배를 통해 성찬을 시도하는 교회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성도들의 가정에 일회용으로 포장된 성찬용 빵과 포도주를 미리 배송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가정에서 화면을 보면서 성찬을 집례하시는 목사님의 인도에 따라서 같이 성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구나, 성찬까지 배달을 하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더 확산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를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읽어드린 2세기의 기록을 보면 예배에 참석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 실제로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예배와 성차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을 하느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혹시 은혜가 되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또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성찬하면 생각나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에서는 예전에 우리가 하던 방식대로 장로님들이 떡과 잔을 성도님들에게 나눠 드리면서 성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잔을 받았다가 함께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잔의 수거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잔을 바로 마시고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잔을 받고서 특히 젊은 남자 집사님들이 아주 그냥 반사적으로 잔을 받아서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서 마십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꼭 어른이 술을 권하셔서 그것을 받는 자세가 그래도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잔을 받아도 그것에서 예수님의 피와 희생이 생각이 나면 성찬을 받은 것이고 이걸 한 잔의 술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술을 마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와 상징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것에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져온 네 차례의 성찬은 각각 성찬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을 나타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느끼실때는 다 똑같이 생각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각각의 성찬의 시간마다 조금씩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성찬식을 집례를 해왔습니다. 먼저 종려주일에는 성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데 초점을 두며 성찬예식을 갖습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이며 우리를 위해 상하신 예수님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 성찬의 첫 번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립기념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은혜의 공동체가 됨을 기억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성찬을 이번에 갖지 못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아무리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예식이지만 일종의 식사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접촉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또 하나의 의미는 성도의 교제이며 또한 천국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받은 성도들의 잔치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또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누구도 차별이 없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눕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성찬의 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가 됩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성찬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우카리스트 혹은 영어식으로 유카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감사예식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초대교회부터 성찬을 부르는 말로 널리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마다 감사의 제목들을 생각해보는데 가장 큰 감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우리의 감사의 가장 온전한 표현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송구영신예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은혜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구약시대의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는 율법에 의해 규정되던 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날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은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는 천국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비록 육신은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하늘의 양식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 삶을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성도 간에 사랑으로 하나됨을 확인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는 은혜가 성찬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동안 첫 번째 성찬의 현장을 기억하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념하며 감사하며 그 길을 함께 따라가는 은혜로운 한 주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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