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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 출애굽기 20:1-3

오늘부터 십계명을 매 주 한 계명씩 묵상하며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십계명에 해당되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열 개로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대부분은 아니 그건 이미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찬송가나 성경/찬송가 합본의 맨 뒷면에 대개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계명 앞에 제 일은, 제 이는, 제 삼은 하고 몇 번째 계명인지를 알려주며 각각의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 일은, 제 이는 하는 말은 원래 본문에는 없는 말인데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편의 상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그런 표시가 없어도 순서대로 열 가지 계명을 구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십계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십계명에 해당되는 본문에는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말이 열 한번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둘을 하나로 합쳐야 열이 됩니다. 그래서 어느 계명들을 합쳐야 하느냐의 문제가 발생하고 합치는 방식에 따라서 유대교와 대부분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십계명의 각 계명을 몇 번째 계명으로 보는지에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열 개로 나누든 상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서 해당 계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의 강조점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계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분으로 기준하여 말씀드리자면 제 1, 2 계명과 마지막 10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1, 2계명을 하나로 보느냐 아니냐, 그리고 제 10계명을 둘로 나누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먼저 유대교의 경우에는 조금 특이한데 오늘 함께 보신 본문에서 1절과 2절은 일종의 간단한 서론이고 3절부터 ~ 하지 말라는 계명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서론으로 보이는 1절과 2절을 제 1계명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 1계명과 제 2계명으로 구분하는 두 계명을 제 2계명으로 봅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구분과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이렇게 구분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우리가 십계명으로 번역하는 말의 원래의 의미는 열가지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꼭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이 본문에서 10가지 말씀들을 구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방식대로 하면 서론의 의미가 본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좀 더 강조가 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제1계명과 제2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개신교에서는 다섯 번째 계명인데 가톨릭에서는 네 번째 계명이 됩니다. 

좀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제 1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이고 제 2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개신교는 이 두 계명을 각각 독립된 계명으로 보고 유대교와 카톨릭은 이 두 계명이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봅니다. 하나의 계명으로 볼 때와 두 개의 계명으로 볼 때의 차이는 하나의 계명으로 보게 되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말씀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부연설명이 되지만 두 개의 계명으로 보게 되면 제 2 계명에서 말하는 우상은 다른 신들의 형상을 말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강조점을 두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계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의 경우를 보자면 출애굽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모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문제의 구절인데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십계명이 출애굽기 뿐만아니라 신명기에도 한번 더 나오는데 신명기에 보면 내용은 거의 같은데 좀 더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타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가 한 계명,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가 또 한 계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므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연결되고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연결이 됩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두 계명으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개신교에서는 다 같이 탐내지 말라는 의미로 합쳐서 이해를 합니다. 

우리는 물론 개신교의 입장이니까 뭘 그렇게 나누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제가 그러면 아내가 소유물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좀 다르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가톨릭의 구분이 더 와 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서 각 계명을 어떤 강조점을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지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개신교의 전통에서 십계명을 구분한 것을 기준으로 하겠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설명을 한 번 더 덧붙이면 개신교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머리가 복잡해 지셨겠지만 루터교의 경우에는 가톨릭과 같은 구분법을 사용한다는 복잡한 사정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십계명 구분에 대해 말씀드린 이유는 십계명 본문이 절대적인 명령처럼 들리지만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을 1절부터 3절까지로 정했는데 제 1계명인 3절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1절과 2절이 유대교에서는 첫 번째 계명이라고 할만큼 중요하고 다른 계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계명으로 생각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찌니라”는 말씀은 십계명 전체의 정신을 대표하는 말씀이고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뒷부분에 나오는 모든 윤리적인 계명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다 하나님 한분만을 경외하는 신앙의 근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 다른 윤리적인 가르침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설교할 때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십계명이 기독교의 윤리의 요약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친숙한 유교적인 윤리의 요약은 삼강오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강오륜은 이른바 인륜만을 강조합니다. 거기에는 신이라든가 하늘에 대한 공경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 부부, 부자간을 말하고 오륜은 임금, 어른, 배우자, 부모, 친구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오히려 인륜이 곧 천륜이라고 가르칩니다. 유교 윤리의 핵심을 한 가지 꼽으라면 바로 삼강오륜에서 부위자강, 부자유친으로 표현되는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효가 확장이 되면 나라의 어버이이신 임금에 대한 충이 되고 더 나아가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제사에 이르면 부모가 바로 신이 되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윤리는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라는 절대 명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계명 때문에 오랜 세월 박해를 받으며 많은 순교자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자들과 협력을 거부하다가 많은 순교자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가장 이상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 기독교 전통에서 이 첫 번째 계명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두고 두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래서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신앙은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 옳다고 하는 고집스러운 배타주의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을 때에 전제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하고 전제를 하고 나서 그러므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들을 구원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고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첫 번째 계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6장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내 정성과 물질을 바쳤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내게 갚아 주실 차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우리가 드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아주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 제를 대학부 시절에 지도해 주셨던 목사님이 사역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옛 제자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셨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 저도 30년 만에 다시 뵙고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대학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다가 그 뒤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오래 사역을 하시고 돌아오셔서 선교단체의 대표로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그날 여러 가지 당시에 우리가 모르던 비하인드 스토리로부터 시작해서 선교사로서 사역하시면서 경험하셨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역하시던 지역의 물이 좋지 않아서 이빨이 여러 개 빠질 정도로 고생을 하셨는데도 그날 그 목사님이 나누신 말씀의 제목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편 116:12)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야말로 눈물을 펑펑 흘릴 정도로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제 1계명을 순종했던 사람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얼마나 깊이 있게 느끼고 고백하며 순종할 수 있느냐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얼마나 깊이 느끼고 고백할 수 있느냐와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강조점은 우선 “나 외에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는”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체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과 감사는 사람마다 주관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은 내가 받은 것보다 내가 드린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로 거슬러 가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이 이 우주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지으시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로 자라왔는데 너무 인생이 고생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네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는데도 지금까지 먹고, 자고, 입고,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왔다면 너야 말로 매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 아니냐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부모도 아닌데 부모 대신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돌보아주었고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대하게 그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실수 있었던 이유는 그 목사님도 혈혈단신으로 이북에서 월남에서 혼자 자기의 삶을 개척해야 했던 경험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얼마나 그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자면 내가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이 계명을 따르고자 한다면 억지가 되고 무리가 되고 두려움과 불안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아서 지키려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1계명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돌아보도록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이 매우 배타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계명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계명을 강조하며 철두철미하게 지켰던 때는 매우 드뭅니다. 우리가 오늘날의 무슨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를 보는 것처럼 구약성경의 계명들을 보면 마치 조금이라도 그 계명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였을 것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문제는 너무나 우상숭배가 일상화되고 만연되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자 했던 왕은 오직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아 이렇게 세 명 명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왕들은 자기들이 앞장서서 율법은 내팽개치고 우상숭배에 열심을 내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겨야 복을 받고 나라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들과 당시에 유행하던 여러 강대국들의 우상을 섬겼지만 그럴수록 나라는 힘을 잃어 갔고 늘 다윗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강대국들의 억압 아래 신음하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들을 이용하고 협박하고 착취하던 강대국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 결과는 결국 그 강대국들의 말발굽 아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 1계명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다른 신들, 다른 종교들, 다른 신앙들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신앙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이 너무 배타적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주 드는 비유가 코끼리의 비유와 등산의 비유입니다. 마치 시각장애인들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며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통나무 같다고 말하고 코를 만지는 사람은 코끼리가 뱀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 같은 코끼리를 만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신앙만을 절대화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도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같지만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말을 하고 있는 자기는 눈을 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지 못하는데 자기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로 각자 다른 것을 만지고 있는 것인지 한 마리의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해 줄 수 있는 그 사람은 도무지 어떤 사람입니까? 왜 자기 혼자만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부분적이며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떤 종교에도 귀의하지 않고 어떤 신앙에도 헌신적이지 않고 바깥에 서서 기웃기웃하던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비유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만일 정말로 누군가가 진리를 알고 있고 그래서 코끼리 전체를 보는 눈을 가졌다면 그야말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눈을 갖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하면 그것은 독선입니까? 아니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산을 오르는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인데 왜 자신이 가는 길만이 옳다고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줍지않게 사전 준비 없이 산을 오르다가 긿을 잃어서 고생해본 경험은 없으십니까? 내가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그 길이 정상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가야 정상으로 가는 것이지 각자가 가는 길이 다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대모산이나 구룡산 같은 낮은 동네 뒷산을 올라갈 때에는 이리로 올라가도 정상으로 가고 저리로 올라가도 정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높고 험한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가는 길은 몇 개가 있을까요? 단 두 개가 있습니다. 성판악등반로와 관음사등반로 두 길만이 정상까지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백두산은 어떨까요? 제가 연변에 있을 때에 백두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백두산이 북한과 중국 땅으로 나눠져 있는데 지금 우리는 북한 쪽으로는 갈 수 없으니까 우리가 백두산 꼭대기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중국 쪽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쪽에서 백두산 꼭대기로 가는 길도 단 두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천지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다면 천지로 가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다른 길은 차로 꼭대기 가지 올라갈 수 있는데 천지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는 있지만 천지로 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천지로 가는 길을 가면 진짜 백두산 정상까지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산은 어떨까요? 에베레스트 산은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들이 한번쯤은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려고 목숨을 걸고 빙벽을 올라 타곤 하기 때문에 그동안 새로운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지 않고 정상까지 비교적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단 두길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놓은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해도 옛 시조에 나오는 것처럼 태산이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르고 또 오르면 정상에 갈 수도 있겠지요. 그래봤자 조금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 뿐입니다. 영원한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과연 여러 개인지,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갈 수 있는 것인지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정말로 정상까지 올라가지도 않고 작은 봉우리 하나에 올라서 어떤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여기가 정상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것은 이 길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 높이 계신 하나님의 보좌앞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으로 오셔서 죄로 인해 병든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들쳐 없고 올라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다 피조물일 뿐이며 진정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쿨하게 자기야, 나보다는 저 친구가 더 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보내 줄게 라고 말하는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떠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면 쿨하게 양보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길로 가면 궁극적으로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길이라면 그 길로 가도록 놔두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꼭 무슨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이 없으면 사람은 대신에 무언가를 절대적인 가치로 삼고 맹신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로마시대의 교부이며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하나님 만이 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그 공허함을 채우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후회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한 삶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과 이 사회를 더 퇴행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극히 상대주의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 것같습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진리, 자기 자신의 정의를 외치며 살아갑니다. 소신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뭔가 소신과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뭔가를 성취하고 인생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한한 경험과 유한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가 그 가운데에서 형성하게 되는 어떤 가치관, 사고방식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 우주의 유일한 진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각자 소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매우 복잡하고 다원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근본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매우 질서정연하고 일관적인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의 영원한 신비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다.(The eternal mystery of the world is its comprehensibility. The fact that it is comprehensible is a miracle.)”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이 우주의 한 구석의 먼지만도 못한 작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이 우주 전체를 바라보며 연구하고 이해하고 근본적인 원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지, 하나의 지성, 하나의 섭리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는 달라, 우리는 달라 하면서 상대성, 특수성만을 강조하다가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을 좌우하는 문제가 됩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들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을 비난하면서 초기에 중국이 제대로 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온 세계가 서로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공동의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라마다 사정이 다른 것 같이 보여도 바이러스가 동일하고 그 바이러스가 감염시키는 인간의 몸이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이며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두어야 할 것도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영원한 진리가 드러나는 외연적 현상들, 외양들일 뿐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를 배타적이고 편협한 세계로 몰아넣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우리에게 성찰의 근거를 주며 삶에 여유와 평안을 되찾아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이 섭리로 다스리시는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각자의 진리, 각자의 소신을 내려놓고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경배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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