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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출애굽기 20:4-6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앞으로 이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이 전 세계에, 그리고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아직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에는 이른 면이 있지만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고 더 많은 면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꼭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은 아니더라도 저는 요즘 제가 익숙하게 여겼던 세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동안 21세기는 참 재미없는 시대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소위 리메이크이거나 속편이거나 이미 소설이나 만화 등으로 인기가 확인된 작품의 영화화입니다. 21세기 벽두에 큰 흥행을 거둔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그 후속으로 나온 영화들은 이미 톨킨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1930년대 말부터 연이어 저술한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잘 알려진 원작을 영화화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디즈니사 같은 경우에는 좀 더 심해서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중적인 동화와 전설들을 각색해서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더니 최근에는 그 애니메이션을 다시 실사화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리메이크를 하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가장 성공적인 영화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는 마블사의 어벤저스 시리즈는 그 기반을 1960년대부터 이미 만들어진 마블 코믹스, 즉 만화 시리즈에 두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미 한번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이 되었던 것인데 다시 최근에 영화화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흥행이 안되지만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골수 팬을 확보하고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도 오리지널 3부작이 나온 이후에 그 이전 이야기, 그 다음 이야기로 확장을 해서 9부작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작품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거대 자본이 투자되는데도, 그러니까 돈 걱정 없이 영화를 만들면서도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기 보다는 소위 흥행의 보증수표에 안주하게 하는 모습은 그것이 소위 자본의 논리인 것인지 아니면 혹시 우리 시대가 창의력과 도전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반증은 아닌지, 관객들도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듣고 추억에 잠기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인류가 20세기에 너무나 큰 격변들을 연이어 경험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좀 쉬고 싶고 익숙한 세계 안에 머물고 싶어하는 경향이 더 커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일어나고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변화들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의 수를 순위를 매겨 나열한 표의 상위권에 위치한 나라들을 보면 마치 무슨 소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OECD 회원국의 리스트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그 가운데 끼지 못하고 점점 순위가 밀려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미국과 유럽이 상위에 있는 순위에서 멀어지면서도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대규모의 전염병들은 다 후진국들에서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전혀 우리의 예상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기후의 차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검사를 못해서 더 많은 확진자가 있는데 통계로 잡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나라들에서 원인 미상의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 더 두고 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황은 뭔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지난 총선의 결과를 놓고 또 여러 가지 분석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보다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진보진영을 이끌고 있는 삼팔육인지 오팔육인지 하는 사람들은 저로서는 비교적 친숙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제가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오히려 진보진영이 기득권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에 지금 연거푸 선거에서 패배하고 있는 보수 진영은 그게 진심인지 그냥 또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늘상 변화와 혁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참 세상이 어떻게 됐는지 여기서 듣던 말을 저기서 듣고 저기서 듣던 말을 여기서 듣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동안 절대적인 구분선처럼 생각되었던 동양과 서양, 선진국과 후진국, 보수와 진보, 공동체와 개인, 일과 쉼, 심지어 남성과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경계가 분명한 것이 없고  혼재되어 있으며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고정관념들이 깨어져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 변화들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은 이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의 변화도 깊은 상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앞에는 분명한 질서와 방향이 놓여져 있었고 우리는 열심히 따라가고 앞서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개화기 이래로 우리 민족의 과제는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서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소위 패스트 팔로워였습니다. 국가적인 과제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이었고 우리는 앞선 나라들이 갔던 길을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나라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전에 듣도 보도 못하던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한류가 유행하면서 BTS가 비틀즈에 버금가는 음반 및 음원 판매 기록을 세우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준다고 하지 않나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우리를 당황시키더니 이제는 전 세계에서 한국의 의료와 방역 체계를 배워야 한다고 하지를 않나, 뭔가 별안간 출세한 느낌이고 적어도 우리가 이전과는 확실이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확실이 기성 세대와는 다른 자의식과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근로자의 날을 이틀 앞두고 벌어진 참사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가 바이러스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아직도 우리나라의 곳곳에 이렇게 낙후되고 비상식적이며 위험한 영역들이 남아있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제들은 이제는 무조건 다른 나라들을 따라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도전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길을 만들어가야 하고 다른 나라들과 함께 해결하고 나아가야 하는 그런 과제들이라는 점이 이전의 과제들과는 전혀 다른 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상황들은 21세기의 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확실한 국가적인, 개인적인 목표가 없다는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이것이 진리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여기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기성세대의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강요하기도 힘듭니다. 그야말로 오늘날의 세계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의 미래를 향해 우리의 고정관념과 익숙한 삶의 방식들을 떠나서 믿음의 도전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익숙했던 예배와 공동체의 불가피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앞으로의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키며 어떤 현실을 받아들이며 어떤 삶의 원리와 목표를 세워가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고 절하고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첫 번째 계명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라면 오늘 본문은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강조점을 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냥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새긴 우상이라는 말과 형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다른 신을 따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신앙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긴 우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신의 형상들이 돌이나 나무를 조각하고 새겨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는 이와 관련된 매우 풍자적인 비판을 들려줍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이사야서 44:15-17)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위트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섬기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사실은 매우 당혹스러운 말씀입니다. 뭔가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다할 대상이 눈 앞에 있지 않으면 구체적인 신앙을 형성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정한수라도 떠 놓고 기도를 해야지 허공에 대놓고 막연히 기도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을 만들고 하나님의 임재를 법궤를 만드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래도 십자가라도 바라보고 예배당이라도 있어야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신앙과 교제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과 우상에 대한 십계명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애굽에서 벗어나서 시내산에 모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세어보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고대 이집트에는 2000개가 넘는 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상들이 유물로 발굴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종교가 신앙의 하나의 규범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이란 당연히 여럿이 있어서 각각 다른 지역을 수호하고 삶의 다른 영역들을 관장하는 것이고 그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 신의 신상에게 절하고 제물을 마치고 정성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몸만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도 그들에게 익숙했던 애굽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익숙한 세계를 떠나서 매우 막연하고 모호한 미지의 세계로 부르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십계명과 다른 율법들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결국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 동안은 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그들에게는 낯선 신의 대리자로서 그들 앞에 서 있는 모세가 놀라운 이적을 행하며 애굽에 큰 재앙을 내리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고 모세의 뒤만을 따라 왔는데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서 모세가 사라진 것입니다. 홀로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세가 다시 돌아올 것인지, 그냥 시내산에서 막연히 기다리다가 다 죽게 되는 것은 아닌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모세의 형인 아론이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든 것이 금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왜 송아지의 형상을 만든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송아지라는 것은 어린 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젊고 힘이 넘치는 소를 의미합니다. 소는 고대인들이 아는 동물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를 이용해서 농사도 짓고 유익을 보기도 했지만 신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애굽에는 많은 신이 있었고 많은 신상들이 있었고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들도 많이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소의 형상을 만든 것일까요? 당시에 애굽에는 특별히 소의 모양을 한 신들이 있었는데 멤피스라는 지역에서 섬기던 아피스라는 신과 헬리오폴리스에서 섬기던 므네비스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므네비스의 경우는 아예 정말로 살아있는 소를 한 마리 택해서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아피스나 므네비스는 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소를 섬긴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피스는 장인들의 신인 프타의 현현이라고 보았고 므네비스는 태양 신인 라의 현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동물의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소의 형상을 섬기며 신을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상이 아니라 소의 형상을 만든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수공업에 종사를 했기 때문에 소의 형상을 한 아피스 신에 대한 신앙에 친숙했고 또 가장 막강한 신들 중의 하나인 태양 신 라의 현현으로 소를 섬기는 신앙이 당시에 헬리오폴리스외에 전 애굽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은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송아지님을 섬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나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자고 한 것이 아니라 이 모세 대신에 너희들이 이미 애굽에서 섬겼던 이 송아지의 형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좀 참고 기다리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금송아지 앞에서 위로를 얻고 잔치를 벌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심지어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리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돌판에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들어있었는데 자기 눈 앞에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며 춤추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도무지 참고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익숙했던 애굽의 세계를 떠나 이제는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고 섬겨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전에 그들이 알던 어떤 신들과도 다른 분이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신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다른 어떤 형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고 그들의 경배를 받고 그들을 사랑하며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것도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 동일시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성경의 말씀을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고 섬기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경험, 우리의 편견, 우리의 지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편리하고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금의 상황 때문에 이전에 가지던 신앙 생활의 패턴들이 깨어지면서 속히 다시 이전의 예배와 교제와 섬김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추세라면 머지 않아 다시 예전의 신앙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면 신앙은 익숙한 세계 안에 머물고 그것을 유지하고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이라는 낯선 땅으로 향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길들여 있었던 애굽 땅을 떠나 낯선 광야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노예제가 일상화되고 로마제국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시작했을 때에,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으면서도 교황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라고 외쳤을 때에, 그들은 모두 익숙한 세계와 결별하고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길을 따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신앙,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가 되는 모험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미래를 주관하십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세상은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다를 것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와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신앙이란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고 우리에게 익숙한 의례를 반복적으로 행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방식으로 교제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서점에 가보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금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그냥 살던 대로 살아,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네가 최고야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다들 마음에 상처가 있고 다들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고 다들 불안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낯선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혼란 속에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는 안정과 위로로 필요하지만 변화와 성장, 그리고 도전과 모험도 필요합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더 나은 나를 찾아가야 하고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낯선 하나님을 우리 눈에 보이는 다른 어떤 것과 동일시하며 안도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낯선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것, 이 땅에 살더라도 하늘을 꿈꾸고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을 신앙의 의미와 가치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신 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고 부정하고는 자기 손으로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종교, 제도, 이념, 가치, 삶의 방식의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머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들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신앙의 전부인양 여기며 안주하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도 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가운데 우리들 스스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닮은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에 결박되어서 유한한 자원을 놓고 다투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생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은혜를 누리고 베풀며 이 세상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켜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의 옷을 입고,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증오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의로움이 아니라 불의의 세계를 정당화하며 창조의 기쁨과 도전의 행복을 모르고 무기력함과 불안함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오늘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 낯설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모범을 따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며 개방하고 담대하게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의사이며 저술가였던 폴 투르니에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인간에게는 모험에 대한 욕구라는 본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인생이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불확실하고 모호한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떠나는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단하고 거창한 모험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움츠려들고 위축되고 불안해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도전과 모험의 본능을 깨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통해 이전에 단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시도,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무도 없는 앞에서 설교를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교회에 새벽기도회에는 그리 많은 분들이 오시지 않기 때문에 한 두분을 놓고 설교를 해본적은 있습니다. 워낙 성실하고 신실하신 성도님들이 계셔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까지 제가 자느라 못나온 날은 있어도 성도님들이 아무도 나오시지 않았던 날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아무도 나오시지 않았다면 그날은 당연히 설교하지 않고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 고난 주간에 저녁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그리고 지금 계속 수요성경공부 영상을 만들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스마트폰의 카메라만을 보면서 기도회 인도를 하고 설교를 하는 매우 낯설고 어색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이것도 제게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고 제 나름의 작은 도전이었습니다. 

최근에 제 지인들 가운데에서 화상으로 모임을 갖는 경우들이 많은데 특히 해외에 있는 친구들과 국내에 있는 친구들이 함께 모임을 갖는 시도들을 하는 것을 봅니다. 화상으로 회의도 하고 모임도 해보다가, 그러면 왜 해외에 있는 친구들과 다 함께 모이는 모임은 하면 안되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국내에 들어올 때에나 모임을 갖다가 그러지 말고 한번 화상으로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누군가 제안을 하면서 그런 만남의 자리들이 이곳 저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이미 보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최근 음악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 연주자들, 성악가들이 각각 자기 집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각각 연주를 하면서 그것을 모아서 일종의 온라인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현실에 대한 적응을 넘어서 이전해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의 방식, 연주의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상설교를 해보고 도 이런 모임들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생각들을 해봅니다. 인간이 물론 물질적인 존재이고 스킨쉽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또한 우리는 정신적인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교제하고 사랑하고 마음을 모으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상황들은 다만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고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뿐 아니라 이전에 알지 못했던, 혹은 알더라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의 기회들을 주기도 합니다.   

본래 미래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세계이고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속에서는 우리의 어떤 경험과 지식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길로 가야한다고 말해줄 수 없습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열린 세계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혼란과 불안은 오히려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닫혀진 세계에서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다투고 경쟁하며 앞서가는 삶에서 떠나서 무한한 사랑과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더 풍성한 나눔과 섬김과 위로와 베품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소망을 가지고 꿈을 꾼다면 어떤 선택도, 어떤 결단도, 어떤 도전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우리를 더 은혜롭고 행복한 삶으로 더 가까이, 우리를 더 진실되고 아름다운 세계로 더 가까이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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