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10(주일) 주일설교 요약

by ADMIN on May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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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 출애굽기 20:7

먼저 아주 고전적인 수수께끼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나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전화번호라고도 하던데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래의 정답은 이름입니다. 내 이름이지만 내가 스스로 나를 부를 때 내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사용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이름의 본래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름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매우 익숙하고 보편적인 것이지만 문화권에 따라 이름이 지니는 의미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나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때에는 매우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십계명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계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서 이름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고 또 한 가지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전통적으로는 후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성과 이름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이름에도 전통적으로는 항렬에 따른 돌림자가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과 돌림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소속을 알려주고 그 집단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에서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은 이름에서 한 부분만을 차지합니다. 요즘은 추세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에서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대부분 그가 속한 친족집단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돌림자를 잘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옛날 족보를 보니까 우리 집안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아예 딸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사위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관행들이 우리나라 전통 사회에서 한 집안, 한 가문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씁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그냥 이름입니다. 다른 것이 덧붙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이라고 할 것이 없고 종종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하는데 그런 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은 그 사람 자체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이름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물론 이름에는 관계의 의미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친분을 맺게 될 때에는 먼저 이름을 교환합니다. 앞에서 수수께끼에서 말하듯이 이름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알려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또 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될 때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신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사람이 나에게 의미있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기를 원하고 또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하나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다라는 말은 예배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어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신 것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놀라운 축복을 말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지금까지도 좀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을 수 있지만 잠깐 좀 더 머리 아픈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이라는 말과 여호와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같이 오늘 본문처럼 같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엘” 혹은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유 명사들 중에 엘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엘이 들어가고 선지자들인 엘리야, 엘리사의 이름에도 엘이 들어가고 장소의 이름인 벧엘, 브니엘 등에도 엘이 들어갑니다. 모두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이고 엘리야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엘리사는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엘이라는 말과 엘로힘이라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이지만 하나님을 가리킬 때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복수형 명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는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복수라고 해서 강의복수라는 부릅니다. 또 하나님을 복수형을 통해 지칭하는 것에서 이미 삼위일체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이라는 말은 고유명사라고 하기 보다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말의 “신”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기 전의 가나안에도 가장 높은 신을 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엘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다른 신들과 하나님이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그분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늘 한 번쯤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여호와라는 말과 야훼, 혹은 야웨라는 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번역들, 혹은 신학을 좀 공부한 사람들이 쓴 글에는 야훼나 야웨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나 야웨나 글자는 동일한데 발음이 다른 것입니다. 

발음이 너무 다르니까 어떻게 같은 글자를 그렇게 다르게 발음하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렇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십계명의 제 3계명의 의미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습니다.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후에 모음이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일종의 발음기호처럼 보충적으로 사용되고 일반적으로 글을 쓸 때에는 지금도 모음을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자음과 모음이 다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글자만 배우면 대부분 다 읽을 수 있지만 모든 말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한자에 사람 인(人)자같은 경우에 두 획으로 된 매우 간단한 글자이지만 그 글자만 봐서는 뜻은 알아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그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배워서 그냥 아는 것이지요. 그것을 전승이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 안에서 어려서부터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자의 경우에도 같은 글자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활(復活)할 때 부(復)자같은 경우에는 다시라는 뜻으로 새길 때는 부지만 돌아오다라는 의미가 되면 복귀(復歸), 복고(復古), 복원(復元)과 같이 복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글자가 사용된 문맥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한자도 전승과 문맥을 통해 그 글자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경우는 글자를 발음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우리말과 한자의 중간 쯤 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자음만 있기 때문에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도의 정보는 주지만 부족합니다. 그것을 전승과 문맥으로 보충을 해서 읽는 것입니다. 

성경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옛날에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어려운 한문책들을 자꾸 읽으면서 배웠듯이 예로부터 읽어오던 방법들이 전승이 되어 왔기 때문에 문맥을 살피면서 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의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경건한 율법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말하게 될까봐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예전에는 다 소리내서 읽었는데 발음을 한 할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그 글자대로 발음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읽다보니 이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승이 끊겨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히브리어에도 모음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모음이 없이 전승과 문맥만 의지하면서 읽는 것이 성경을 잘 아는 학자들이 아니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의 경우에는 전승이 끊겼기 때문에 모음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말,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음을 떼어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에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발음이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발음은 후대에 만들어낸 발음이기 때문에 원래는 어떻게 읽었을지 우리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그런 연구로 먹고 살기 때문에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발음이 야훼 혹은 야웨인 것입니다. 같은 글자에 다른 모음을 붙여서 읽은 것입니다. 

앞에서 엘리야의 이름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축약되어서 사용될 때에는 “야”라고 쓰입니다. 그래서 앞글자의 발음이 원래 야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여전히 여호와라고 되어 있고 우리에게 그 말이 훨씬 더 익숙하고 어찌 되었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에도 여호와라고 모음을 덧붙여 표기가 되어 있고 야훼나 야웨는 학자들이 연구하여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앞으로도 계속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상영되었던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우주의 장대함을 영상으로 표현 한 것도 있지만 주인공이 자기 장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아보지를 않아서 다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장인과 같은 집에서 사는데 늘상 장인을 도널드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이런 상놈의 집안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는 정서가 별로 낯설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높은 분의 이름을 알아도 전혀 입으로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살 차이만 있어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형, 오빠, 누나, 언니라고 부릅니다. 조금 먼 사이면 직함이나 다른 호칭들을 사용합니다.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건 서로 동등한 친구가 되었다는 뜻이거나 싸우자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예전에 경건한 유대교 학자들처럼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은 앞에서 수수께끼에서 말씀드린 이름의 의미처럼 우리가 사용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들의 이름도 감히 부르지 않지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 종교에서 각각 존경하는 성인들이 있는데 유교에서 공자(孔子)님도 성은 공씨지만 이름은 원래 구(丘)입니다. 언더 구자를 쓰는데 짱구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을 부르면서 누구도 공구라고 부르지 않고 공자라고 부르는 것은 존칭의 의미로 자자를 성에 붙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원래 이름은 싯달타인데 누구도 그렇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존경하여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거리낌 없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것이 그 종교가 발생한 지역의 문화의 차이일 수 있지만 또한 그만큼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이름을 알려주시고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을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지만 또한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친밀한 관계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계명은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설교나 강의를 하게 될 때에 한번쯤 언급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영화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찰턴 헤스턴 주연의 십계라는 영화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전에 다시 크리스챤 베일 주연의 리메이크가 만들어 졌지만 원작 만큼의 감동이 없다는 평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있는 장면을 그린 십계 영화의 포스터도 매우 인상적이고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도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화가 폴란드의 거장인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가 제작한 데칼로그(Dekalog) 시리즈입니다. 데칼로그라는 말은 열 개의 말씀들이라는 뜻으로 원래 히브리어의 십계명이라는 말의 본 뜻과 같습니다. 이 작품은 십계명의 한 계명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는데 그렇게 10부작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다시 극장판으로 만들어져서 개봉이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두 번째 편에서 오늘 본문의 계명을 다룹니다. 두 번째 편에서 다루는 이유는 폴란드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데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가톨릭에서는 십계명을 구분하는 방법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말하는 제 삼 계명을 제 이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여인인데 그녀의 남편은 의식불명으로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있었고 그 사이에 애인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덜컥 아이까지 생기게 됩니다. 이 여인은 고민을 합니다. 남편이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당연히 남편과 같이 살고 싶지만 남편이 죽게 되면 지금 애인과 같이 살아야 하겠는데 그러면 지금 뱃속에 생긴 아이의 문제가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면 아이를 낙태를 하고 애인을 떠나서 남편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남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면 아이를 낳고 애인과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의사에게 남편이 회복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의사는 남편의 증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여인의 말을 듣고는 남편이 죽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믿고 그 여인은 낙태 수술을 취소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예상대로 남편은 의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뻐하면서 병에서 회복된 것도 기쁜데 다시 일어나 보니 아이까지 생겼네요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의사에게 남편이 회복될수 있겠나고 묻고 의사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니까 맹세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의사는 담담하게 맹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사가 거짓말을 한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의사는 이차세계대전때에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의사에게는 가족이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고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절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거짓 맹세를 해서라도 지금 낙태하려는 여인의 의도를 막고 생명을 살리고 이 가정에 새로운 가족을 얻게 하는 것이 더 선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을 맹세와 연관시키고 맹세의 의미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서양에서는 맹세한다는 말과 함께 하나님께 맹세한다는 말이 자주 같이 쓰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맹세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뜻이 된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매우 일반적이 제 3계명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이 계명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고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신중하게 맹세를 하고 말을 해야 하며 중요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 의사의 입장을 우리가 신앙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3계명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된 말을 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며 선하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근거없는 주장을 하고 진실을 어그러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대교리문답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매사에 거짓과 악한 습관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설교자들에게 경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빈번하고 심각한 오용은 양심과 관련된 영적인 곳에서 일어납니다. 거짓 설교자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지꺼리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루터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 면죄부를 팔러 다니던 설교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무슨 영업사원들처럼 면죄부 판매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성경에도 없는 말들을 지어내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것을 비판하고자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제 스스로도 많은 반성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 가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과연 성경에 있는 대로, 진정한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3계명의 첫 번째 의미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좀 익숙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말과 행실은 얼마나 진실된 것이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세 번째 계명의 마지막 세 번째 의미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신 것은 그 이름과 함께 그 이름에 담긴 능력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내가 잘 아는 업체나 식당을 지인들에게 소개해 줄 때에 내 이름을 대면 잘해줄거야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그 업체, 그 식당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징하고 그 관계의 힘을 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권능이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권능이 있고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놀랍게도 그 이름에 담긴 능력을 우리도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주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이름을 중얼거린다고 일이 잘 풀리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 있는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니까 그 지역에 있는 스게와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능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하고 소리치며 덤벼들어서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제 친구가 제가 교회다닌다는 것을 알고는 “너는 예수쟁이니? 나는 불교신잔데”라는 말을 했던 것이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혹은 비하해서 예수쟁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때에는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약간은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를 에워싼 모든 악한 것을 향해 우리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말할 수 권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담긴 능력과 축복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친밀한 교제와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이름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 이름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 이름의 축복과 권능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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