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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 / 잠언 23:22-26

오늘부터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모든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두 가지 계명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십계명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 1계명부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고 오늘 주제인 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터 마지막 제 10계명인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까지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십계명 돌판이 두 개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첫 번째 돌판에는 제 1계명에서부터 제 4계명까지가 기록되어 있었고 두 번째 돌판에는 제5계명에서부터 마지막 계명까지가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구분이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십계명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십계명의 앞부분의 말씀들은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계명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씀들이고 동서고금 어느 사회, 어느 국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대부분 받아들이고 사회윤리의 기초로 강조하는 내용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하는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특별하게 설교할 내용이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세요. 네. 아멘, 하면 끝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는 함정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몸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수시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한다든가 졸리면 자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정말로 당연한 것들이고 이미 우리가 당연히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령해야 하고 반복해서 강조해야 하는 것들은 당연하다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는 것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라는 금령들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인간들에게는 부모를 거역하며 다른 이들을 죽도록 미워하고 성적인 유혹에 빠지며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마음이 보편적으로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보자면 율법이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 더 진지하게 각 계명이 존재하는 의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내가 이미 당연히 알고 있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 안에 담긴 미묘하고 중요한 차이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는 중국 연변에서 사역하고 돌아온 후로 10년 동안 연변으로 선교사로 파송되는 분들을 교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강조하던 것이 연변을 낯선 곳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많이 발전을 했지만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낙후된 곳이 많았고 특히나 연변은 북경이나 상해같은 대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큰 도로에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변에 간 사람들이 대개 처음 하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60년대와 똑같다는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족 동포들은 우리와 같은 말을 쓴다고 생각하니까 선교하러 가는 분들이 그야말로 현지 문화에 대한 아무런 이해와 준비가 없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살아보니까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차이점들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랜 세월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하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르고 언어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이질적이라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고 하고 나중에는 이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꼭 연변 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여행을 자주 다녀 보신 분들은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겉보기에는 미국이나 유럽같은 나라들보다는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사고방식이나 문화가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을 대할 때에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당연하게 여기는 내용들이 성경에도 그대로 나온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효의 가르침과는 무엇이 다른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을 던져보면서 접근을 할 때에 같은 점과 함께 차이점들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효경(孝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니 불감훼상이 효지 시야니라(身體髮膚는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머리털과 피부는 모두 부모님에게 받은 것이니 잘 돌보아서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효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입니다. 효경에서는 행실을 바르게 해서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떨쳐서 부모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효의 완성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만큼 효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마음은 사실 효와 상관이 없이도 당연히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데 효를 모든 인간의 마음과 행위의 근본으로 삼아서 이 세상의 질서를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효는 우리나라의 전통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의 근본이며 진리를 평가하는 가치 척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주역 중에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목사님은 친구였던 김종섭이라는 사람의 전도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종섭이 예수를 믿게 된 데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생긴 김종섭이 당시 평양에서 선교하던 미국에서 온 사무엘 마펫 목사를 찾아가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니까 마펫 목사님이 “옳고 말고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펫 목사님도 부모가 계시며 효도를 합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펫 목사님이 “나도 부모가 계시고 공경하는 마음이 많습니다”라고 또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진짜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지금 부모를 버리고 만리 타국에 와 있으니 이것이 어찌 효도입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마펫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아니면 불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이 질문에 김종섭이 “물론 순종이 효도지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마펫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나보고 조선 가서 예수교를 전하라고 하였소”

김종섭은 마펫 목사님과 대화를 하고는 아, 기독교도 효도를 중시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여 안심을 하고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기 친구 길선주에게도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효가 진리를 분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경의 다른 여러 구절보다도 부모에 대한 공경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고 기독교도 효를 중요시한다고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모 공경과 유교의 효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효가 제사와 결합해서 종교의 지위에 까지 올라갑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의례는 조상제사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모부터 받은 은혜와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고 감사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상들이 여전히 우리의 일상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길흉을 좌우한다고 보기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성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는 선교 초기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등 유교문화권에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고 제사가 우상숭배인가 아니면 효의 표현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큰집이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제사는 그냥 집안의 행사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을 해서 별로 갈등이 없이 제사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촌형들이 대학입시를 보게 되었던 해에 큰아버지께서 형들을 맨 앞줄에 서게 하시면서 할아버지에게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아직 어렸을 때인데도, 그럼 이건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교적인 입장에서의 효의 의미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모 공경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르치고 부모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하며 은혜로 보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또한 더 근본으로 여기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효 사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의 경전들에는 공자님, 맹자님부터 시작해서 효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고 효행의 본보기가 되는 효자, 효녀들의 열전을 자주 접할 수 있고 사람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효행에 대해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모든 문화권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웨이터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새로운 사업상의 파트너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에 그 사람이 웨이터에게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시중드는 사람,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 그 사람의 인성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중요한 계명들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은 돌로 쳐서 죽이라는 계명도 있지만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조되는 두 가지 율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될 때에 여러 선지자들이 수없이 경고를 했지만 선지자들은 우상숭배를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정의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지 불효해서 나라가 망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앞에서 구약성경의 율법 전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구약성경에서 이웃을 대표하는 존재들은 삼강오륜에 나오는 부모, 스승, 친구, 부부, 임금이 아니라 객, 고아, 과부입니다. 예수님이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서 이웃이란 곤경에 빠진 낯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하나만 보고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 단정지어 버리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과 삼강오륜을 지키는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유교의 경전에는 수많은 효자, 효녀들이 등장하지만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 중에 그들의 효행으로 기억이 되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굳이 찾아보자면 노아가 술취해서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에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던 셈과 야벳의 이야기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자기의 고향이었던 모압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주하며 나오미를 봉양했던 룻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암시된 좀 더 많은 사례들을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려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묵묵히 순종한 이삭에게서 효의 모범을 찾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자기를 아들취급도 안하는데도 아버지의 양을 치며 그 양 한 마리라도 들짐승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곰과 사자에게도 달려들었다는 다윗에게서도 효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이야 말로 효자중의 효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고 우리나라 사회에서 복음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선교적인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효자라고 할 때에는 성경의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효에 대해 가르치면서 유교하고 비교한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효에 대해 읽었던 옛 고사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요순시대라고 말하는 중국의 태평성대의 대표적인 시대의 왕이었던 순 임금의 어릴 적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순은 요 임금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요 임금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순이 덕행이 뛰어난 것을 보고 요 임금이 순을 사위를 삼고 왕위를 물려주었게 된 것입니다. 순은 어렸을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후처에게 빠져서 순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순에게 매질을 하는 때가 많았는데 보통 매로 때리면 그대로 맞았지만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버지가 때리면 이유를 불문하고 당연하게 맞아야 하지만 만일 자기가 아버지의 매를 맞고 죽게 되면 아버지가 불의한 사람이 되어 불효를 하게 되기 때문에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창고 지붕을 고치라고 해서 지붕에 올라갔을 때에 아버지와 계모가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창고에다 불을 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순은 가지고 올라갔던 삿갓 두 개를 손에 들고 뛰어내려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에도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정도 이야기는 해야 효를 강조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고 성경에도 부모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들을 우리의 상식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성경 속의 맥락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순서를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명들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래서 앞부분의 계명들과 뒷부분의 계명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즉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이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부모님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으셨지만 그 생명을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낳고 사랑하고 기르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수하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앙과 지혜의 전수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오늘 본문으로 삼은 잠언에서는 지혜를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강조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가르침이 가장 많이 담긴 책이 잠언입니다. 그런데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또한 자녀는 부모를 공경함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한편으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낳고 기르신 은혜에 대한 보응이 자녀로서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모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전수해 주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지혜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주는 존재이며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전통적인 삶의 방식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라떼는 커피의 종류중의 하나인 우유를 넣은 카페 라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부장님들이 젊은 사원들에게 늘 “나 때는 말이야”하면서 소위 꼰대질을 하는 것을 비꼬는 말입니다. 그때하고 지금은 다르니까 자꾸 옛날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오히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들을 가르치기보다 오히려 배워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커피 이야기를 좀 더 드리자면 저는 한 때는 커피 전문점에 가면 에스프레소 커피를 자주 마시곤 했습니다. 특히 설렁탕 같은 국물이 많은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게 될 때에는 양이 많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진하고 양이 적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카운터에서 에스프레소 주세요 하고 말하면 점원이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저, 에스프레소는 커피 원액만 나오는 아주 쓴 커핀데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물어보는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좀 심한 말로 하면 당신 나이 좀 든 것 같은데 커피를 알아?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를 뭘로 보고 하면서 기분이 나빴지만 좀 생각해 보니까 대개 메뉴의 맨 위에 에스프레소가 있으니까 커피에 대해 잘 모르는 어르신들이 와서 무작정 맨 위에 있는게 가장 만만해 보여서 주문했다가 막상 커피가 나오면 이게 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점원들이 처음부터 확인을 하라고 교육을 받았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르면 배워야 하는데 아는 척하다가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에게 처음 스마트폰을 사줄 때에는 경제적인 부담도 되고 아이들에게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 웬만하면 저가형으로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 아빠는 잘 쓸 줄도 모르면서 왜 맨날 좋은 폰만 사냐고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는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이 세상을 사는 법을 더 잘 아는지, 누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들의 많은 경험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 쓸모가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길을 따라오라고 말해야 하는지 너희들의 길을 개척해가라고 말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런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기업의 총수들의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분들 대부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기업을 일군 1세대 창업자들의 아버지의 이름을 누구 하나라도 알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왜 우리는 모를까요? 그 이유는 대기업을 창업하고 우리나라 경제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한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해 우리는 관심도 없고 별로 알고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벤처기업이니 스타트업이니 하면서 창업을 강조를 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더 이상 아버지의 길을 떠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보다 그 그늘과 그림자에 머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맹자는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후손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또 그 책임을 여성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수모를 주고 쫓아내었던 잘못된 관습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맹자는 다른 두 가지를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의 해석을 보면 그 두 가지는 첫째는 부모에게 아첨을 해서 부모를 불의하게 만드는 것, 둘째는 부모가 연로했는데도 수입을 얻지 못해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불효 세 가지를 오늘날에 새롭게 해석해 본다면 효란 무조건 부모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두려움 없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서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공자나 맹자도 그 시대에는 개척자이고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고 사람들이 그 그늘에만 머물려고 하고 과거에만 안주하려고 하다보니 사회의 발전이 지체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존경받는 부모가 되는 길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부모를 공경하는 방법은, 부모가 살아왔던 길을 그대로 따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그 길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치고 미래를 열어주며 관습과 전통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한 자유와 정의의 길을 따르며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유교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유구한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첫 출발점에는 “너의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땅으로 향했던 아브라함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양육하되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되 주 안에서 공경하며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일반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해 한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서양의 학자들이 한국문화를 연구하면서 썼던 책들에서 한국 사회는 중국 보다 더 중국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유교는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중국에서는 그 전통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오히려 한국 사회가 더 유교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 오던 윤리적인 가치의 근본을 상실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하며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배웠고 효에 대해서도 수많은 효행의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배우며 효의 의미를 깨닫고 당연한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영어와 수학 공부는 많이 하지만 가치와 윤리와 도덕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영어와 수학은 더 깊은 학문을 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과목들인데 이런 도구 과목들이 모든 교육을 압도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에는 새로운 윤리적인 기반, 새로운 가치관의 기초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 사회를 위한 새로운 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유용한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르칠 것입니까?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새로움을 설레임과 경이로움으로 맞이하게 해주고 진취적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도록 도움을 주는 그런 지혜, 그런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진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이고, 우리의 인생을 가로막는 죄와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이고 오늘도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에 대한 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기성세대는 복음의 진리를 전수해 줄 수 있을 때에 가장 합당한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고 그 분들의 진심을 헤아리며 그분들의 사랑과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진실된 삶을 살아가며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며 더 깊은 진리의 길로 이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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