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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 마태복음 5:21-26

오늘부터 9시에 1부 예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오든지 교회학교도 문을 다시 열고 수요예배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듯이 지금 상황이 그렇게 썩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태원 클럽과 모 기업의 물류센터 등에서 발생한 확진자들로 인해 또 다시 감염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증은 더 이상 감염시킬 사람이 없어야 멈추게 됩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감염이 되거나 백신을 접종하여, 다 항체가 생기는 시점이 되어야 멈추게 됩니다. 다행히도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들도 양심은 있는지 바이러스의 독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바이러스도 같이 죽게 되기 때문에 독성이 강해서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일수록 전파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하고 독성이 약해서 별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 바이러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확진자는 조금씩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그에 비해 사망자의 수가 같은 비율로 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사망률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시간과의 싸움인데 백신이 나오기까지는 우리는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잠시 긴장을 하고 격리되어 지내다가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다시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안고 새로운 습관들을 익히며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지병이 있는 분들은 완전히 치료가 된다기 보다는 꾸준히 약을 드시고 관리를 하면서 생활하게 됩니다. 관리만 잘 하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바이러스 감염증의 경우도 방역수칙을 일상화하면서 장기전을 대비하는 것이 현실적인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상황이 좀 더 심각해지면 다시 자제를 하고 다시 확산세가 누그러들면 좀 더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 계속해서 반복이 될 것입니다.

교회로서도 지금의 상황을 전적으로 현장 예배로 다 모이거나 모든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으로만 전환하는 것의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적절하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예배와 모임을 병행하며 교회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들도 방역의 수칙을 지키면서 절제와 배려를 생활하며 함께 모이는 예배와 교육과 또 개인적으로 가지는 경건의 시간들을 통해 믿음을 지키며 우리의 살아갈 은혜와 힘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계속해서 절제를 하면서 지속 가능한 예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지금 여러 교회들이 오히려 주일 예배 횟수를 늘려서 한 번에 모이는 성도들의 숫자를 줄여서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시 예배를 다시 드리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요예배는 주일예배보다 참여하시는 인원이 더 적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상황을 이겨나갈 은혜와 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으로서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교회학교를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많지만 학교 교육이 중요하여 등교를 무작정 연기할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학교 교육도 중요합니다. 다음 세대 우리나라 교회를 이끌어갈 소중한 우리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교회학교도 상황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을 병행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길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상당히 무책임하게 들리는 것 같아서 꺼려지기는 하지만 오늘 교회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성도님들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시도록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둘 뿐 아니라 이웃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두 가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상충이 되는 경우에 적절한 균형점이 무엇인지는 교회에서도 가능한 자세하게 지침을 드리고자 하지만 결국은 성도님들 각자가 스스로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될 때에 이 상황을 가장 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 속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있게 행동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 현대교회 성도님들이 모두 다 양식이 있고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계셔서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에서 그때 그때 알려드리는 지침을 잘 따라주시고 각자 지혜롭게 판단하셔서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로서는 달라지는 상황에 따라 그 때 그 때 판단하며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성도님들의 양해와 배려와 협조를 계속해서 부탁드립니다. 

작금의 상황이 불확실하고 힘들기는 하지만 또 어느새 제 자신도 새로운 환경에 점점 적응되어 가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외출을 할 때 마스크를 챙기고 손소독제가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혹시라도 마스크를 하지 않고 거리에 나갔다가는 웬지 예의없고 개념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달리 남들의 시선에 민감한데 그런 태도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남들이 다 안 쓰는데 혼자 쓰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만 남들이 다 쓰는데 혼자 쓰지 않는 것도 신경이 쓰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신 여부와 상관없이 남들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태도가 늘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같은 상황 속에서는 괜히 근거없는 큰소리를 치는 것보다는 그냥 남들 따라 마스크라도 쓰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최소한의 배려가 될 것입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짐을 지며 현실적인 필요들을 채워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오늘 주제는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십계명 강해를 시작하던 첫 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올해 십계명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주제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살의를 품고 누군가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들이며 그들이 그렇게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자손들이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유와 근거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두 형제자매들이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에 십계명의 앞부분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십계명의 뒷부분에서 말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을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존경하고 공경해야 하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상호성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나도 그들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며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협력하며 그들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윤리적인 규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성은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나에게 적대감을 보이거나 손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대로 갚아주려고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도 내게 대해 더 큰 적의를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호성이란 선순환으로 서로 더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보다 악순환이 되어 서로 경쟁하고 배척하며 미움을 정당화하는 사회로 나아갈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당연히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근거를 이 세상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죄된 본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늘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삶의 근거는 우리의 경험과 이해관계에 있기 때문에 왜 내가 저런 사람들까지도 존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절로 나오게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는 근거가 그 사람 안에 있거나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나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해득실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고 내가 베푼 선행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 도처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증오와 미움으로 폭주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점점 더 채워져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나 신명기에 나오는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모세를 통해 받았던 사람들을 “옛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민족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데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은 낯설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고 구약성경만을 절대적으로 받드는 유대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충돌이 된다고 생각이 될 때에, 우리는 주저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고 구약성경을 읽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구약성경의 가장 근본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외적인 행동의 규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지금도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쌓여있던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어느 순간 폭발을 하게 되면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묻지마 살인 혹은 분노살인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쌓여서 불특정한 대상을 상대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증오심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감정에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위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형제에게 노하는 사람, 형제에 대해 라가라고 하는 사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라가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바보, 머저리 정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의 욕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머리가 텅 빈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늘 본문을 읽고 계시는데 사모님이 방에 들어오셨답니다. 그러니까 “나가”라고 하셨답니다. 사모님이 놀라서 왜그러냐고 하시니까 “라가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되고...”라고 하시면서, 응.. 성경을 읽고 있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참 정말로 간이 크신 목사님인 것 같은데 그러다가 정말로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이미 살인죄나 마찬가지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타인에 대한 증오와 멸시가 살인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상황을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없고, 눈에 보이는 자기의 이웃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거두고 화해에 이르게 되는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받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있거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형제에게 미움받고 원망받을 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을 정당화하여 그것을 쌓아놓게 되는 이유는 내가 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먼저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도 저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될 때에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간의 오해와 적대감을 풀고 화해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가 힘들어지게 된 데에는 나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게 되면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용기를 내어서 내가 먼저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화해의 손을 내밀게 될 때에 그 사람도 마음을 풀고 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서로 간의 감정을 정화하고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물론 늘 그렇게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많이 섭섭하고 마음이 상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는데도 그 사람이 오히려 그렇다고,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게 되면 섭섭함은 더 하게 되고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때로는 그 순간 참았던 것이 폭발을 하면서 더 큰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해는 우리들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사자들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물론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은 나 혼자라도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해주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그런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래도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저 사람의 마음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내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내가 해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마음이 풀어지고 나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신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내가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고자 할 때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내가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해받고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인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는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늘 앞서고 설령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도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성찰의 문제입니다. 내 자신의 자존심,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 스스로를 깊이 살피며 성찰할 수 있을 때에 나도 다른 사람의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지만 그러나 또한 가장 의미있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들, 특히 내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해와 용서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나의 잘못과 부족한 것을 아시고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걸 알아야 그래도 좀 철이 든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결혼을 해서는 아내가 나의 잘못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부모로서의 부족한 모습을 이해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내가 형제에게, 다른 사람에게 원망받을 만한 일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우리 안의 원망과 분노도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더 큰 죄를 저지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다스려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통해 마침내는 선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웃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비유로 가르쳐 주신 것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골짜기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먼저 그 사람 곁을 지나간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알고 또 자기 스스로 실천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이 계명에 해당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죄에 버금가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어떤 강도이고 자신들은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범죄의 현장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오히려 저 사람이 저렇게 강도를 만난 것을 보면, 그리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 일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어쩌면 아직도 이 주위 어딘가에 강도가 숨어 있다는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어서, 그래서 내가 도와주면 이 사람이 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사람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더 크게 느끼면서 그 자리를 피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어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은 원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놓고 멸시하고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눈에는 이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원수인 유대인 중에 하나로 보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만큼 율법을 잘 알고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저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저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간다면 저 사람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자기도 갈 길이 바빴겠지만, 그래서 강도가 출몰하는 위험한 때에 산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그는 그의 계획이 틀어지고 지체되는 것을 감수하며 자신이 가진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서 응급조치를 하고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서 내리고 그 죽어가는 사람을 대신 태우고 여관으로 가서 그 사람을 맡기고 그 사람을 돌보아줄 비용까지 대신 내주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그렇게 그냥 맡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서 비용이 더 들었으면 그것까지 계산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내 안에 있는 분노를 극복하고 나의 원수의 생명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계명은 단순히 악행을 금하라는 뜻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미리 보호하지 못할 때, 미리 구하지 못하여 고통과 피해를 입게 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옷을 입힐 수 있는 형편인데도 헐벗은 자를 그대로 두면 당신은 그를 얼어 죽게 버려둔 것입니다.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보았는데 먹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를 굶어 죽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직면한 자들이나 그런 위급한 순간에 처한 사람들을 보거나 또는 구할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살인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말로나 행동으로 죽음을 방조한 일이 없다고 변명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 스스로 사랑의 권리를 제거해 버렸고 이웃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리도록 하는 선행을 스스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만난 사람이 제 때 도움을 받지 못해 죽게 되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나는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슬퍼하며 자책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이웃의 생명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한몸 돌보기에도 바쁘고 내 가족 챙기기에도 여념이 없어서 이 세상 어디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어떤 생명의 위험에 쳐해있는지 관심조차 가질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다 도울 수 없고 내가 다 돌볼 수는 없다고 해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들을 애통하게 생각하며 나의 손이 닿는 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기에서 구하고 고통에서 건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자연이 파괴되며 이전에 인간들과 접촉하지 않았던 야생동물들과 인간들이 새롭게 조우하게 되는 곳에서 어떤 신종의 바이러스가 등장해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적절한 치료와 돌봄을 받지 못하며 장기간 바이러스 전파자로 방치된 사람이 있다면 결국 어느 순간 우리의 생명도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파자가 될 수 있습니다. 뭐 그냥 걸리면 걸리는 것이고 죽으면 죽는 것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나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이고 그들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 나와 내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의 생명과 건강도 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돕고 섬기며 우리들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최선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며 온 세상에 생명의 향기가 풍성하게 퍼져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해진 말씀의 주제가 있어서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생명의 영으로 역사하셔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십니다. 

오늘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다스리고 서로 서로 협력하며 배려하며 사랑하며 섬기고 돌봄으로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은혜의 전파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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