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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내지 말라 / 출애굽기 20:17

오늘 주제는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열한 번째 계명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열한 번째 계명은 “들키지 말라”랍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금하시는 계명들입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일본 문화에 대해 분석하면서 일본 문화는 수치의 문화이고 서양의 문화는 죄의식의 문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윤리의 근본에는 유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교는 절대자와의 관계 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많이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나의 윤리와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교의 윤리를 요약한 삼강오륜에는 신과의 관계, 절대자와의 관계에 대한 항목 자체가 없습니다. 모두 인간과의 관계를 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관계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들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이 됩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성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는 나를 중심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유대인은 원수였지만 예수님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푼 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느냐를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까지 포함하기 어렵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나도 죄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제한을 두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차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유일하게 특정한 대상을 언급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모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님들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함을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태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문화의 핵심에는 종교가 있고 문화는 종교가 표현되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가치관과 문화와 윤리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에 모든 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정신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 뿌리에는 기독교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사회가 세속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떠났습니다. 그 가운데서 최근에 테러와 난민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니까 왜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지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윤리의 근본이 되는 종교를 상실하게 되면서 윤리적인 가치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는 기독교 문화와 윤리를 어떻게 세워가야 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의 가르침이 내면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겉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아직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체면을 이야기하고 학벌이나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나라에는 두 가지 종교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하고 불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교"와 "내맘교"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를 나무랍니다. 너 그렇게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 그러면 자녀가 대답합니다. 내맘이라고, 내 맘대로 하지도 못하냐고 대듭니다. 여기서 행동의 기준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입니다. 기성세대가 믿는 종교는 남들교이고 젊은 세대가 믿는 종교는 내맘교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오직 남들교와 내맘교의 다툼, 남들과 나 자신과의 다툼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내면화하는 것은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니”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지”로 바뀌는 것,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로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끝내게 되지만 앞으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서 살아가기를 정말로 바라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갑갑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가?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면서 행복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는데,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인데 십계명은 너무 사람을 옭아매어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끼게 되기 보다는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하고 암송하면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십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어떤 틀안에 가두어서 답답하고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고 우울하게 살게 만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많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것들만을 하지 않으면, 이 계명들만을 지키면 우리에게는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에 감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재능을 개발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성취하며 행복과 만족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불행과 후회와 불안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해줍니다. 교만과 미움과 거짓과 잘못된 욕망들이 우리의 삶을 망치고 무너뜨리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십계명은 일종의 경기의 규칙과도 같습니다. 경기의 규칙이 무너지고 오직 승리만을 추구한다면 모든 운동경기는 패싸움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선수들과 관중들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이 서로 규칙을 준수하면서 경기를 할 때에 이기든 지든 그 경기를 즐길 수 있고 그 경기를 관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계명들인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의 목적은 나의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인격과 가정과 재산과 명예를 지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인격과 가정과 재산과 명예가 소중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율법이든 복음이든 그 근본에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계명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질서 안에서 행복하고 보람있고 가슴벅차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8계명을 다루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내면의 마음과 생각에 초점을 맞춘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탐심은 인간의 죄의 근원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사탄은 최초의 인간을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번째 계명은 독립적인 또 하나의 계명이라기보다 앞에서 말한 여러 계명들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인격과 재산을 존중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욕망이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우리의 생존욕구, 우리의 자아 실현의 욕구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이어질 수 없고 지속된다고 해도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구와 욕망은 비슷한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존의 욕구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런 욕구들이 다 억압받고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존속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기가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배려해서 배가 고파도 울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도 못하니까 크게 울면서 내가 배가 고프다, 내 욕구를 채워달라고 소리쳐 외쳐야 그 아이도 살고 어머니의 사랑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욕구들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욕구가 있기 때문에 만족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이런 욕구들은 채워지면 해소가 됩니다.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배고픔은 사라집니다.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자부심을 느끼고 뿌듯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의미에서 성경이 경계하고 금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르고 채워질수록 더욱 우리를 갈망에 빠뜨리고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에는 병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져도 불안하고 많은 것을 누려도 감사함이 없습니다. 늘 비교하는 마음에 시달리고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기 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배가 고팠을 것이고 그러면 동산에 있는 과일들을 먹으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베풀어주셨고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욕구가 있기에 만족도 있고 감사와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지금까지 그들이 누렸던 그들의 만족과 행복과 감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고 난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매이지 않는 더 자유롭고 더 위대한 존재가 되어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수치스럽게 느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몸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부족하고 불만족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탐심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독차지하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는 나의 것이 있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내며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 악한 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합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왕궁 곁에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에 욕심을 내게 됩니다. 그의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했는데 나봇이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을 팔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것이 근심이 되어서 먹지도 자지도 못합니다. 탐심에 빠지니까 자기가 가진 많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얻지 못한 것만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왕비인 이세벨은 이해를 못합니다. 무슨 왕이 자기가 원하는 것도 갖지 못하느냐고 생각하며 거짓 증인을 세워서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해서 사형시키고 그의 포도원을 아합 왕이 갖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합의 집에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아합같은 악한 왕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나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 내가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야근을 하시고 늦게 오시는 날에는 늘 맛있는 빵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아버지가 늦게 오시는 날이었는데 그때 문득 아버지가 사오시는 것을 동생들과 같이 나눠먹는 것이 싫고 나 혼자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동생들이 울게 되면 울다가 잠이 드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혼자 먹으려면 동생들을 재워야 하는데 그러면 울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갑자기 동생들을 가서 때렸습니다.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동생들이 울면서 왜 때리냐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도 왜 동생들을 때리냐고 야단을 맞았지만 그래도 저는 오직 빨리 동생들이 자야 할텐데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잠이 들었는지 그날 아버지가 무슨 과자를 사오셨는지 내가 그것을 혼자 기뻐하며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그 날은 제 인생에서는 제가 선악과를 먹은 날입니다. 그전까지는 같이 아버지가 사오신 것을 먹으면서 행복해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오시기를 동생들과 같이 기다렸었는데 어느 순간에 동생들의 존재가 성가시게 생각이 되고 나 혼자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렇다고 못된 짓만 하고 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건 잘했다 싶은 일들도 있는데 제가 고3이 되었을 때에 학기 초에 반장을 뽑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고2때에 반장을 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고3이라고 공부한다고 아무도 반장을 하려고 안하니까 네가 작년에도 반장을 했으니 그냥 네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처럼 반장을 하는 것이 생기부에 기록이 되는 스펙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공부에 방해만 되는 것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반 아무개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2까지 부반장만 했는데 아마도 그 친구는 반장을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 친구도 거절하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친구를 부르셨는데 그 친구가 제 예상대로 하겠다고 해서 그 친구가 반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반장 역할을 잘 했고 또 여러분들 아시는대로 고3 반장은 영원한 반장입니다. 졸업하고도 친구들 모임들도 주도하면서 지금까지도 반장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고2때 반장을 하기는 했지만 별로 잘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의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선생님이 담임못하겠다고 교실에서 나가신 적도 있고 그래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또 고3이 되어서 담임선생님이 반장을 하라고 하니까 욕심이 나고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옷은 제가 입을 옷은 아니었습니다. 능력도 부족하고 그 일을 통해 제가 더 불행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은 양보를 했고 그 결과가 너무 좋게 나온 것이 제게도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무조건 더 많이 가진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가지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가르쳐 줍니다. 나의 욕망이 나의 신이 되어서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지시합니다. 그리고 내 머리는 부지런히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사람들의 흠집을 찾아내며 비난을 하고 배제하고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정당화하며 행동에 옮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의 재물을 도구로 이용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재물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이웃을 미워하며 우리가 원하는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도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재물과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인생을 보람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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