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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부활 / 고린도전서 15:35-44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 세상에서 종교가 하고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역할이 있지만 대별하여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과 죽음의 의미,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오늘날 종교 이외의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가르침, 조언들, 지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단순한 경험적인 처세서적에서부터 좀 더 무게있는 심리학적, 철학적인 책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얻은 통찰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나눠웁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종교가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철학적, 과학적으로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책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죽음학(Thanatology)라는 학문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연구들도 죽음에 대해 다루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영역들과는 달리 죽음이란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사람들의 경험, 혹은 그런 경험에 대해 분석하는 소위 임사체험에 대한 글들이 있지만 과연 임사체험이 진정한 죽음에 대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들도 많고 그 문턱을 넘어선 죽음 너머의 세계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세계이고 아직도 종교 이외에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요한 종교들마다 저마다의 내세관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에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의 경우에는 인간이 업보로 인해 여러 육체를 입고 거듭해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를 가르치고 또 이러한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가르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지난 500년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유교는 조상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사실상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유교적인 인간관에서 인간이란 하늘의 기(氣)와 땅의 기(氣)가 모여서 형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다시 하늘의 기와 땅의 기로 흩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그 실제적인 의미는 유교적인 죽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의 기인 혼과 땅의 기인 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날라가고 백은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존재론적으로는 소멸하게 됩니다. 다만 그 소멸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데 그것이 4대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제사는 4대까지만 지내는 것입니다. 4대가 지나면 완전히 하늘과 땅으로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제사를 받을 조상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음이후의 삶이 어떤 목적이 될 수가 없고 이 세상의 삶에 집중합니다. 공자는 삶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는 것과 대를 잇는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는 오직 자식들을 통해서만 후대에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효 중에서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 사후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는 기독교적인 내세관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종말관 혹은 내세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부활과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과 다음 시간에 다루는 사도신경의 마지막 주제입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기에 불완전한 이유는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과 함께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세의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이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육신을 만드셨고 그리고 그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먼저 영혼을 만드시고 그 영혼을 담을 그릇으로 육신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이 물질세계는 그저 덧없고 일시적인 무상의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나타나는 공간입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인 죄가 이 세상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죄와 악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지 이 세상이 죄로 물들었고 인간의 육체가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버리고 육신을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암송한 바가 있듯이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표현합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우리의 육신은 장차 소멸되고 영혼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몸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육신이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육신이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히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첫 시작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몸의 부활에 대한 교리는 매우 낯설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몸의 부활만 믿을 수 있다면 사도신경의 모든 교리를 다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을 믿으면 당연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기독교적인 죽음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6월에 암송하고 있는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당연하게 죽음의 권세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에서도 기독교적인 세계 속에서 죽음이 최종적으로 인간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이 불완전한 말이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육신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죽음으로 소멸되게 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죄로 인해 훼손되고 다시 회복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육신은 회복시키지 못하고 영혼만을 구원하게 되는 그런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망가진 것을 고치지 못하고 그냥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육신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며 몸의 부활, 육신의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에도 몸의 부활에 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두 구절에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데 이사야서 26장 19절에서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과 땅에 죽은 자들을 내어놓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서 12장에서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서 12:2-3)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생을 받을 부활이 있고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할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이렇게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대에 등장하는 여러 유대교의 분파들 중에서 사두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직접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찾아가셨을 때에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39-4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선포에서도 부활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성도들의 부활의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데살로니가 4:16-17)”

바울은 부활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에 대해서 로마서에게도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11)”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바울이 거듭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유대교를 따를 때에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이미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부활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변화시키시고 사도로 부르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쳤고 또 그어떤 주제보다도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몸의 부활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활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육신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육신으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에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더 큰 영광을 나타내시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 이후의 육신은 이전의 육신과는 다른 더 큰 영광을 지닌 육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씨의 비유를 듭니다. 씨를 심으면 씨가 죽는 것같이 보이지만 거기에서 더 큰 생명이 자라납니다. 씨가 모든 것이 아닙니다. 씨 속에 더 놀라운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 더 놀라운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생명을 담기 위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육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지 지금 이 육신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변화되고 다시 살아남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누리는 삶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데살로니가전서에 묘사된 것처럼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과 종말적인 부활 사이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죽음이후에 부활이 있기까지 사이의 시간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의 육신은 땅에 묻히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시 깨우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과 관련하여 루터는 매우 흥미로운 글을 남겼습니다. 먼저 죽음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맛보지도 보지도 않는다. 그는 죽음을 느끼지 못하고 죽음에 의해 겁 먹지도 않고 다만 그가 잠드는 것처럼 정말로 죽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게 평화롭게 죽음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은 죽음을 느끼고 죽음에 의해 영원히 공포에 질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차이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대 이 말씀을 갖고 그것에 강하게 붙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활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을 얻을 때까지 잠시 잠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오셔서 무덤에 노크하고 마틴 박사, 일어나게 하실 때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즉시 일어나 영원히 그와 함게 행복을 누릴 것이다.” 루터가 남긴 이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분리가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잠들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는 다시 깨어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온 세상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권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간으로는 긴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죽음 이후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매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 이 땅에 완성된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관련하여 철학자 칸트도 매우 흥미로운 글을 남겼습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도덕적이라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이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적인 실천 능력인 덕이란 한갓 이론이나 훈계를 통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는 경향성이라는 적을 무찌르려는 끈질긴 시도를 통해서, 곧 수행적으로 개발되고 훈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 의무의 완수를 우리는 이승에서 다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덕의 도야는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거룩하고 사랑이 많은 존재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불완전하며 언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가 온전히 변화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신앙의 경륜이 오래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다른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시험에 들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칸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승을 넘어선 삶, 이승의 시간을 넘어선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약속과 우리의 불완전한 현실은 우리에게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과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완성될 것을 알기에,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살아있는 순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현재의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는 날까지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교훈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이 생뿐이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살아서 결실을 볼 수 없는 일들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신앙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약속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지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작한 모든 일들이 결실을 맺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가 직접 그 모든 일들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임을 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으며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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