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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초를 기억하소서 / 예레미야애가 3:19-24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지난 14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7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문적인 연구자였기에 우리가 그의 업적을 다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빅뱅이론과 블랙홀 연구에 크게 기여했고 “시간의 역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21세부터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근육이 점점 무력화하는 병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고 나중에는 목소리까지 잃어서 대화를 하려면 전자발성장치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에 의사들은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경우 근육의 무력화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는 특이한 경우여서 그 후로 50여년을 더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대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한 명의 과학자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누구나 행동의 제약을 받는 영역이 있고 또 누구나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스티븐 호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친구가 한 사람 있습니다. 저와는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지금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인데 어려서부터 뇌성마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대화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지만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땄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되어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SNS를 통해서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가 올리는 글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사역하는 지를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티븐 호킹의 삶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킹 박사의 불편한 신체 조건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은 이에 대해 농담하기를 즐겨한다고 합니다. 비록 혼자서는 안경조차 제대로 고쳐 쓸 수 없는 극도로 불편한 처지이나 그는 오히려 ‘조깅을 하거나 골프를 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유혹을 받지 않아서 좋다’고 하며 자신이 지닌 장애의 장점을 자랑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아 좋다...’ 저 역시 이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 장애인들은 몸이 부자유스러워 바깥 활동을 많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답답하고 손해 보는 일도 많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만큼 나쁜 유혹을 받을 기회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죄를 지을 일도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장애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사는 것도 죄긴 죄이지만, 특별히 남을 속이거나 해를 끼쳐 사회악을 조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오히려 장애가 있어 능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지닌 장애가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불편하고 수치스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신앙적 관점으로는 유혹도 덜 받고 죄도 덜 짓게 하며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는 훌륭한 장점이자 은혜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역시 내가 공부를 하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나의 뇌성마비 장애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애를 앓아 외부 활동을 자주 할 수 없었기에 공부에 집중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으며 다른 나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바르고 곧은 삶을 살아왔다고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장애가 있어 생활은 비록 불편할지언정 세상적인 유혹과 죄에서 자유로움을 받아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고 죽어서도 구원과 영생이 보장되니 이 아니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한탄만 하지 말고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남겨주신 것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의 발달, 의학의 발달로 전례없이 많은 고통에서 해방되었지만 개인의 행복과 번영 외의 다른 삶의 의미들을 다 잃어버렸고 전통과 공동체와 신앙의 보호막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비전을 잃어버렸기에 고통 앞에서 이전보다 더 큰 무력감과 혼돈과 절망을 느낍니다.

우리는 왜 인생에 고통이 있느냐고 묻지만 고통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언제나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고통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의미와 사명을 이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피하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만나는 시간들을 힘겨워하며 점점 자기 세계 안으로 움츠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다른 이들의 삶을 살필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고통 속에 있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연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얻습니다.

성경은 고통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느냐고 묻지만 성경은 고통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고통의 현장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읽고 또 기억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나서 우리 마음에 남는 것은 “예수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떤 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그 영토는 남한의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나라가 하도 큰 소리를 치기에 대단하게 보이는 것뿐이지 당시의 세계사적인 대제국들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존재는 미미했기에 고대의 역사 기록에서 이스라엘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껏 나타나는 것이 비석에서 앗수르왕에게 절하는 이스라엘왕의 모습이 등장하는 정도입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의 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고통의 현장을 봅니다. 성경의 많은 본문들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참으로 신기한 점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고난이 그들의 신앙을 앗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번영만을 약속하는 신이었다면 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 신앙도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수많은 고대의 신들이 그들을 섬기던 사람들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영만을 약속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속에서 함께 하시고 억눌린 자들, 짓밟힌 자들의 편에 서시고 우리의 고난에 의미와 소망을 찾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예레미야애가를 묵상해왔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의 함락의 폐허에서 부르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 속에서 혼란을 느끼고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모든 고난 속에도 소망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그는 그가 당한 고통을 “내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왜”라고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질문을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은 “우리가 진멸되지 않음”으로 표현됩니다.

많은 이들이 적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휩쓸어갔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 환란의 풍파 속에도 나는 지금 여기 남아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이곳에 남겨두신 이유에서 소망의 근거를 찾아갑니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는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오랜 세월을 도망을 다니며 살아야 했지만 그 가운데 많은 그의 동료들이 처형을 당하고, 전쟁터에서 죽고, 고통 가운데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탁월하고 선한 사람들은 죽고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모순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지고 가책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고통 속에서 슬퍼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반드시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언제나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악입니다. 고통은 많은 것을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파괴합니다. 누군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이미 하나님을 떠났고 고난의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아남아있습니다. 그러기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느끼는 모든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입니다. 그리고 여기 살아남은 자들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삶을 추모하고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통과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다시 일어나 우리의 삶을 추스르고 내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위로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러나 또한 고통받은 자들과 함께 하고 연대하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피셔킹(Fisher King)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상에 두려운 것 없이 거친 입담으로 유명한 라디오방송 진행자입니다. 어느 날 방송 중에 애청자의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어느 고급 바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너무 잘난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 주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거기 있는 놈들은 다 허세에 찌든 악마들이야. 그들을 그대로 두면 우리가 당한다고”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총을 가지고 그 바에 난사하여 7명이 죽게 되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영화는 3년 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 사건으로 그 진행자는 일자리를 잃고 폐인과 같은 삶을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을 성배를 수호하는 중세의 기사라고 말하는 한 정신이상자를 만나고 그에 의해 구조를 받습니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고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환상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바로 그날의 사건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고통으로 정신이상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해자, 한 사람은 피해자이지만 모두 그날의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전의 진행자는 그를 만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를 이해하고 그를 도우며 그와 우정을 이어가게 됩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이 있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 소망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남겨두신 이유는 이 세상에 위로를 전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어밀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고통을 아는 이들이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고 고통의 잿더미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소망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전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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