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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사도행전 9:3-9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960년대 한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김승옥 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평론가들로부터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김승옥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무진기행을 읽던 중에 우연히 그분이 예수를 믿고 간증집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간증집 속에 그분의 체험한 구체적인 영적인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80년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일간지의 소설 연재를 중단하고 방황기를 갖게 되었고 그때 아내의 인도로 교회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문뜩 잠에서 깨어보니 방안에서 한 사람의 손이 보였는데 마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처럼 보이는 손이었습니다. 그 손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느낌을 받으면서 “누구냐”고 외쳤는데 약간 울림이 있는 굵은 목소리로 “하느님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체험이 기록되어 있는데 영화 각본을 쓰기 위해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 각본은 안 쓰고 성경을 읽고 있는 중에 누군가 옆에 서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그분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옆에 바싹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 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햐안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서 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중략) 그 위엄있는 예수님의 표정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 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했던 마음이 실감되었다. 그 사랑과 위엄 그 순결함 앞에서 나는 숨어야 할 죄인일 뿐이었다.”

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고 더 분명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해외선교를 갈 때에 선교팀을 구성하고 교육을 합니다. 그리고 하루 MT를 가는데 그 때 내가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지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내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님들이 나누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10명이면 10명이 각자 다 다른 체험을 갖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가 다를 뿐 아니라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가 이후의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캠퍼스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전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해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다 큰 성인이 전도하여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은 “전도 못해 못해”해서 모태신앙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런 분들은 신앙의 연륜과 깊이를 통해 또한 다른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고 믿음생활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하여 위대한 선교사 바울로 다시 태어나게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사울과 바울이라는 두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을 따로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사울은 유대식 이름,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원래 히브리 이름은 시몬이었는데 성경에는 헬라식 별명인 베드로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사울로 불리다가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이방인들에게 친숙한 헬라식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회심이 그렇지만 바울의 회심 사건에도 이후로 바울의 신앙의 여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체험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예수 믿은 사람들을 다 잡아 가둘 수 있는 허가를 대제사장에게 받아서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때 일어난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3-5)

이 사건은 전형적인 회심의 장면과는 좀 다릅니다. 바울이 자기 죄를 고백한 것도 아니고 예수 믿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었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가져왔던 확신이 무너지며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사건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그것도 매우 열정적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믿음과 열정은 다른 이들을 향한 위협과 살기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그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고”(9:1)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더라”(8: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강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기와 위협이 가득찬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의 신앙, 더 나아가 당시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의 근본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에는 그들이 그래서 매사에 승승장구하고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세월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더 열심을 낸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확신을 훼손하는 예수믿는 자들 같은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자들이기에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길이다라고 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의 신앙의 확신은 다른 이들을 향한 위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확신에 가득차서 성도들과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바울이 가졌던 신앙의 근거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는 거짓선지자다” “예수는 죽었다” “그를 믿는 자들이 이 땅의 화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예수는 거짓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신 분으로 그 영광의 광채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분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아계셨고 그분이 이 땅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가 나를 박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고난을 당신 자신의 고난으로 여기시고 스스로 그들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체험을 통해 바울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임을 늘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이 세상의 어떤 조직과도 다릅니다. 이 세상 다른 조직들은 이끌어가는 이들, 크게 수고하는 이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행세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줍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조직이 유지가 되고 발전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해줄 뿐 아니라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영향력도 키워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누군가가 주인행세를 하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뜻대로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사람들을 만들고자 할 때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회의 근본원리가 세상의 어떤 조직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시고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모습이고,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저는 종종 목사라는 직분, 목사라는 직업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합니다. 목사가 사장일까요? 그렇게 행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가 교장이고 선생이고 교회가 학교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는 다만 목사일 뿐입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람일뿐이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믿고 따르도록 전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일뿐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장로님들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도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을 받은 종들일뿐입니다.

최근에 소위 “교회 세습”이 교계에서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세상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자라난 사람, 그래서 교회를 더 잘 알고 그 교회의 전통을 이어갈 적임자, 그래서 성도들의 지지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공공연하게 오너가 경영하는 것과 월급사장이 경영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럼 우리는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기업입니까? 목사가 교회의 오너입니까?

교회는 예수님이 책임지시는 모임입니다. 예수님이 주목을 받고 예수님이 없으면 안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 그 목사님이 아니면, 그 목사님의 아들이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잘 되고, 누가 없으면 안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하고 모두들 부족한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도들도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지식이나 인격이나 배경이나 모두 다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오늘날 내노라하는 교회들의 담임목사로 지원을 한다면 대부분 원서접수도 힘들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권능을 받았고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들을 보면서, 베드로가 대단하고 요한이 대단하고 바울이 대단하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대단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성도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믿는 사람들은 엘리트중의 엘리트인 자기 자신과는 다른 근본없고 배운 것이 없는 잡 것들의 모임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감히 율법을 뒤흔들고 세상을 소란케 하는 것을 그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그저 사람들의 모임일뿐이라고 생각하면, 교회 안에서도 세상적인 자랑과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가운데,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그분이 사랑하여 부르신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고 자신은 조용히 섬기며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 가지 표어가 있어서 해마다 그 뜻을 다시금 새겨보며 성령의 임재가 가득한 교회, 나눔과 섬김이 풍성한 교회, 그리고 참여와 헌신이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표어의 표현들을 다듬을 때에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참여와 헌신을 묘사하는 단어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름다운”이라는 말을 쓰게 된 이유는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는 참여와 헌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참여와 헌신이 교회를 온전하게 세웁니다. 그런데 그 헌신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아름다운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가득한 교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심을 확신하는 교회, 그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교회가 나눔과 섬김이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고, 그 은혜로 성도들이 서로 배려하고 감싸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섬길 때 참여와 헌신이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들, 섬김의 자리들은 조직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서로 나누어 맡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에너지를 떼어 내놓아야 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 안에 계시며 당신을 나타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며 우리의 삶의 자리에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은혜를 충만하게 채우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해의 모든 섬김의 자리를 통해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성도들과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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