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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을 허신 그리스도 / 에베소서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러시아의 화가 미콜라 피모넨코(Mykola Pymonenko)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특히 농촌의 일상의 모습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려낸 화가였습니다. 어느 날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유태인들이 모여 사는 한 마을에서 한 아가씨가 기독교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기독교(정교회)로 개종을 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 때문에 분노하여 소동을 일으켰고 그 여인은 마을에서 내쫓기게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피모넨코는 한 폭의 그림에 이 소란스러운 장면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이 여인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여 그가 개종하였음을 나타내고 있고 오른편에서 그의 부모가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며 동네사람들이 다 몰려나와 이 여인을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의 제목을 “광신주의의 희생자”라고 붙였습니다. 이 소란의 원인이 광신주의(狂信主義)에 있다고 보고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이 종교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안타까운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일반인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혹은 신앙은 있지만 그다지 크게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이든지 그 신앙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미움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은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강조하지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강조하게 되면 진리와 비진리가 나눠지게 되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추구하는 진리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는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차별이 없이 모든 죄인들을 맞아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랑을 하나님만이 가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그 사랑을 나눠주셔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하고 섬기는 삶으로 부름받았음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진리의 핵심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진리를 강조하면 사랑이 사라지고 사랑을 강조하면 진리가 약화되는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과연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늘 사랑의 편에 서있었는지 아니면 신앙의 이름으로 증오를 부추기고 정당화해왔는지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달에 종교개혁일을 기념하면서 부흥회를 열고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럽에 갈등과 분열을 가져왔고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해왔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독일을 분열시켰고 유럽을 두 진영으로 분열시켜서 30년전쟁이라는 참혹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종교전쟁”에 대한 과제를 맡아서 발표를 준비한적이 있습니다. 자료들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고 정리하여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그때 큰 딜레마를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때문에 전쟁을 했다고 말하기는 너무나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고 그렇다고 당시에 종교는 그냥 사람들이 갖다붙인 표면적인 구실이었다고 하기에는 신앙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쟁 후에 유럽은 비로소 종교적인 관용의 정신을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 관용이란 열광주의로부터 한발 물러서는 것,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내려놓는 것, 이런 갈등과 희생을 낳는 종교적인 확신에 대해 회의가 확산되는 것의 의미하였고 결국은 유럽에서 세속주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세에 종교는 유럽을 통합하는 이념이었지만 종교개혁 후에 종교는 갈등과 분열, 증오에 대한 원인 제공자가 되어버렸고 평화를 위해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 개혁에 대한 열정은 선한 것이지만 그 진리 안에 담겨있는 사랑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인간의 열심은 또 다른 비진리의 도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바울은 누구보다도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 헌신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회심은 우리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평생을 종교적인 열정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탕하게 살았던 시기와 신앙을 갖게 되었던 거룩하게 살았던 시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는 종교적인 열심에 빠져있던 시기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선교적인 열정 속에서 살았던 삶으로 나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가진 진리의 확신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타인을 핍박하고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이 희생하고 자기 자신이 순교자의 자리에 이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를 에워싼 두 가지 담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첫 번째 담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과 우리를 단절시켰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쫓고 우상을 섬기며 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의 고난으로 그 담을 허셨고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웃들과의 사이에 쌓아놓은 담입니다. 바울의 시대에 그가 느낀 가장 높은 담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놓여있는 담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그 담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고 그 담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 핍박하여 그 담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므로 그 담을 허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어떻게 “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데 있던 이방인들이나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셨고 이 둘이 하나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멀리 있던 너희”라고 말할 때에 얼마나 멀리 있던 사람들을 생각했을까요? 아무리 바울이 상상력이 풍부했더라도 당시에 이 극동의 한반도에서 사는 한국 사람들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생각했던 땅끝은 기껏해야 스페인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 밖에 있던 그것도 아주 멀리 있던 이방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것도 아주 열심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멀리 있던 낯선 이들을 품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사랑을 잊고 때로 우리의 신앙의 열심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한 담을 다시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분열될 때 그 맨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아직 신앙의 진리를 모르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열심있는 신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다툼은 아직 성경을 잘 모르고 신앙의 진리에 문외한인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잘 알고 믿음의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은 영약한 존재이기에, 그러나 또한 어리석기에 신앙의 진리를 쉽게 왜곡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게 편을 가르고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다른 이들을 배제하므로 자신들이 더 옳고 열심히 있으며 진리에 가까운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의 열심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은 사랑의 열심이 되지 못합니까? 왜 누군가를 더 사랑함으로 그 신앙을 증명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거부함으로 신앙을 증명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혐오를 부추기는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을 품어주고 낯선 이들을 영접하며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이 되고 타인에 대한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므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즘 글로벌한 세상을 되어가면서 우리나라에도 점점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고 전에는 낯설게 여겨지던 이슬람국가와도 교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교계에서 이슬람에 대한 경계가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이슬람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이슬람 국가와 교류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이슬람국가들은 기독교에 대해 가장 폐쇄적인 나라들인데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온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 온 것이 아닙니까? 교계가 이슬람 선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들을 배척할 이유를 찾는다면 교회의 선교의 사명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은 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고 환대하고 도와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유학으로, 이민으로 미국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환대받고 신앙을 갖게 되었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만약에 미국인들이 낯선 이들을 경계하고, 저 동방에서 온 황인족들, 유교와 불교라는 낯선 신앙을 가진 이들을 배척했다면 어떻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19세기 말에 중국인 노동자들의 이주가 늘어나자 황화론(黃禍論, Yellow Peril)을 주장하던 이들이 아시아인들을 위험시하여 경멸하고 폭행하며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목소리가 높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동양에서 온 작고 힘없고 가난한 유학생들, 이민자들을 돕고 환대해주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깨닫게 한 것 아니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멀리있던 낯선 이들이었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인의 최고의 덕목은 어느 시대나 자기 의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진리에 가깝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의 깊이를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더라도 우리의 몸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외식, 위선, 비진리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배제와 차별과 갈등과 증오를 정당화하는 이념,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어왔습니다. 기독교까지 그들의 편에 서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낯선 이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므로 우리를 지켜주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자리는 오히려 배척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편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그 자체로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도 아무 쓸데없어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을 전하며, 먼데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사랑의 도전으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진리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믿음의 삶, 사랑의 실천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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