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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와 높은 자 / 에스더 3:1-6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3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오늘 본문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혼동할만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에스더도 있고 에스라도 있고 에스겔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에게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히브리어로는 전혀 다른 이름들입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친근하게 들리도록 발음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지 같은 집안이라든지 이름의 뜻이 비슷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환상으로 보며 증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자유를 얻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켜준 학자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할 때에 귀환하지 못하고 페르시아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에스더서는 사로잡혀온 백성들, 그러나 돌아가지 못했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야 했던 이들이 어려움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과 믿음의 승리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왕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닙니다. 보통 세계사에서 그의 이름은 그리스인들이 부르던 “크세르크세스(Xerxe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큰 군대를 거느리고 그리스를 침공했던 왕이었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300”이라는 영화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국가들 중 하나인 스파르타의 300명의 용사들이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던 전설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그 영화 속에도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가 등장합니다. 크세르크세스를 이탈리아어로는 세르세(Serse)라고 하는데 작곡가 헨델은 “세스세”라는 제목의 이탈리아어 오페라를 작곡한바가 있는데 이 오페라도 크세르크세스 왕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도입부에 나오는 옴브라마이푸(Ombra mai fu)라고 시작되는 아리아가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더와 아하수에로가 아닌 다른 두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로 모르드개와 하만이라는 사람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오빠로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에스더를 돌보아주던, 에스더에게는 부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에 에스더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으로 대궐의 문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왕을 암살하려고 모의를 하는 것을 듣고 에스더 왕후에게 고해서 그들이 처형되고 왕의 목숨의 위험을 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 공이 있었지만 왕은 그에게 어떤 상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여전히 대궐 문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하만입니다. 성경에는 무슨 연유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아하수에로 왕은 그의 지위를 높여서 모든 대신들보다 높은 지위를 주었고 그에게 절하여 경의를 표하도록 했습니다. 득의양양하여 으스대며 하만은 대궐 문을 나섰고 모든 사람들이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궐 문 앞에 있던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모르드개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융통성이 없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스더에게는 절대 자신이 어떤 민족인지를 밝히지 말라고 여러번 당부했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에 궁궐 안에서 어려움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라는 이름도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그가 이방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양보도 하고 타협도 하고 적응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선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엎드려 절을 하여 예의를 표현하는 문화 속에서 살았고 해마다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풍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절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인들도 원칙적으로 사람에게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을 통해 페르시아와 여러 동방의 나라들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들 나라의 고관들과 백성들이 알렉산더에게 그들의 풍습대로 엎드려 절을 하고자 했을 때에 알렉산더는 그런 풍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왕 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는 절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정복전쟁에 참여했던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에게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4세기가 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처음으로 황제에게 절을 하는 예법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황제의 칭호는 “첫 번째 시민”이었습니다. 초기의 공화정의 전통이 남아있어서 황제는 시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전통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반란이 잇달으므로 제국의 통합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여 국가를 통합하려는 의도로 동방의 풍습을 받아들여서 황제에게 절을 하는 예법을 그제서야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절을 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경건한 유대인인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던 과거의 교훈을 기억하며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만은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분노하였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유대인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왜 하만은 이렇게 분노를 했을까요? 비록 모르드개는 절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며 자신을 공경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날이 그의 인생의 최고의 날이 아니었을까요? 한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얻은 이 좋은 날에 왜 모르드개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여서 최고의 기쁨의 날을 분노의 날로 망쳐버리게 된 것일까요? 오히려 관대하게 대함으로 자신의 너그러움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요? 자신이 왕을 대신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면 왕의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사람의 공적을 미리 알아보고 모르드개를 죽이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칭찬해 주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그 자리에 정말로 합당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는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마찬가지로 하만도 소수민족 출신이었고 지금 자기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에 대해 분노함으로 그는 자신의 불안을 표출하고 사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본의 아니게 노출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왕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아끼고 돌보는 에스더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었고 그 일의 결과로 그가 상을 받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지나가도 모르드개로서는 그에게 왜 경배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모르드개보다는 하만에 가깝지 않을까요? 다른 이들에게 인사하기 바쁘고, 또 나도 인사를 받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불만을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만이 모르드개보다 그렇게 대단한 존재일까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하만이 모르드개보다 그렇게 대단한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 하만은 화를 내는 것일까요? 그는 자신이 원하던 지위를 얻었고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절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명예와 부의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개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더 많은 재물을 원할 때 우리가 내세우는 명분은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더 안정을 얻고 더 평안하게 살 수 있고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한껏 자존감이 높아지게 되면 오히려 작은 거슬림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무시당하는데 익숙해진 사람, 참는 것밖에 별도리가 없는 사람은 견딜 수 있고 또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사람은 달라집니다.

화를 내고 불평을 하는 것도 일종의 권력의 표현입니다. 내가 힘이 없을 때는 참고 싶지 않아도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힘이 생기고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더 많이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내 감정을 드러내면서 내 영향력을 입증하려고 하고 화를 내도되는 내 자신,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해도 되는 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며 감사의 제목들을 생각해보는 때이지만 만일 우리가 감사보다는 불만을 더 많이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실은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론 중에 “J커브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뒤집어진 J 커브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고도의 성장기 이후에 찾아오는 짧은 쇠퇴기에 사람들은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어 사회적인 소요사태나 혁명이 그러한 때에 더 많이 발생한다는 이론입니다. 한 사회가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게 되고 밑바닥을 칠 때보다는 지속적인 상승을 경험하다가 일시적으로 쇠퇴하는 순간을 사람들은 더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언젠가 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냥 답답한 마음에 “완전히 다 꼬여버려서 되는게 하나도 없네”라는 말을 내뱉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 친구가 저를 바라보면서 “꼬였다는 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고 내가 방금 했던 말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 친구야 말로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에 진학해서 이러저러한 경험들을 하면서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 친구는 가정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 당시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이어서 막노동을 하며 일을 해서라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히려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견디고 버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던 친구였습니다. 내가 일이 뒤틀리고 꼬였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은 그만큼 나의 삶에 여유가 있고 기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지금 만족하고 있지 못하고 감사의 제목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아무런 자격이 없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높은 자라고 착각을 하며 정말로 대접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감사의 절기에 우리의 불평, 불만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을 먼저 생각하며 값없이 받은 은혜의 제목들을 기억하고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는 은혜로운 시간들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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