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6(주일) 주일설교 요약

by ADMIN on Aug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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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 민수기 26:63-65

63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64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수기(民數記)는 백성들의 수를 세어 기록한 책입니다. 1장과 26장에 두 번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뚜렷한 스토리가 있으면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만 이렇게 각 지파별로 파악한 백성들의 수를 기록하는 내용들은 읽기에 지루하고 왜 이런 내용들이 들어가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인구조사에 대한 내용을 빼면 민수기가 아닙니다.

반복되는 기록은 질서와 평안을 보여줍니다. 1장에 나오는 첫 번째 인구조사는 광야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조사이고 두 번째 조사는 광야생활 40년을 마치면서 조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광야생활을 견뎌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스러운 기록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돌보심에 대한 기록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긴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기억들이 이 숫자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한 지파, 한 지파 수를 세어 보고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하였고 또 얼마나 감격했을 지를 상상해 본다면 이 기록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의 명단에 들어간 사람과 두 번째 인구조사의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의 겹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던 첫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두 번째 조사에도 포함되었고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40년 전에 가나안땅을 정탐하러 갔던 12지파의 대표들 중에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눈으로 가나안땅을 보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의 눈에 그 땅의 거민들은 그들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느낀 두려움이 온 백성들에게 퍼져가서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도 40년의 세월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내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들 둘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간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그들이 탁월하고 그들이 순수하고 그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의 과제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나안땅에 가게 된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정탐꾼이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광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서 광야생활의 짐을 함께 졌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후대에 많은 과학적, 수학적 영향을 끼친 여러 천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헤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2000년 전에 증기기관의 원리를 고안하고 증기의 압력을 이용해서 신전에 자동문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헤론 한 사람 때문에 그 시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제 사회였기에 굳이 기계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냥 노예들을 시키는 것이 더 값싸고 간편했기 때문입니다. 한 두 사람의 천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같지만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어떠한 사회, 어떠한 시대를 만나느냐, 과연 새로운 변화를 위해 그 사회, 그 시대가 준비되어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40년간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성경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원망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축복의 땅을 등을 돌리고 광야생활의 짐을 짐을 져야 한다는 불만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꿈을 잃은 백성들과 함께 그들도 꿈을 잃고 체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광야를 방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40년 후에 여기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광야에서 함께 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그 40년간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40년 후에 그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어서 그가 40년동안 꿈꾸던 가나안땅으로 온 백성들을 이끌고 함께 들어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갈렙은 더 중요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 중에 단 두 사람 만이 가졌던 상징적인 지위의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온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여든 넷의 나이에 자신이 직접 가나안 땅의 정복의 최전선에 서서 40년 전에 자기가 보았던 그 땅을 직접 점령하는데 앞장서면서 진정한 노익장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40년동안 그들의 꿈을 지켜내었고 결국 그 꿈이 이루는 데 앞장서고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위대함은 그들의 믿음의 탁월성과 그들이 그 믿음을 끝내 지켜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백성들과 보조를 맞추며 함께 인내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꿈을 잃지 않고 백성들에게 그 꿈을 공유하고 비전을 심어주었다는 데에 더 큰 중요성이 있습니다.

선구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구자는 앞서 가면서 뒤쳐진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들만이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혼자 잘나서 다른 이들의 몰이해를 비난하고 매사에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선구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선구자가 선구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앞서갔다는 것, 즉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결국은 다른 이들이 함께 가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을 우리도 보게 하고 그들의 꿈을 다른 이들도 꾸게 하고 그들의 설레임을, 두근거리는 가슴을 전해주어 결국 모두가 함께 그들이 꿈꾸던 그 것을 이루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선구자였다고, 그들이 우리가 갈 곳을 미리 보여주었다고 그들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40년동안 다른 이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도 헛되이 40년을 보내다가 그냥 죽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원망을, 불평을, 불신앙을 물려주었다면 40년이 아니라, 400년, 아니 오늘날까지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실패했고 자신들은 꿈을 이루지 못했어도, 그리고 한때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믿지 않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으려 했을지라도, 이제 돌이키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꿈을 그들의 꿈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 꿈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모든 백성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각 가정마다 회개와 반성과 새로워짐의 역사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을 대신할 사람들을 키워냈습니다. 그들보다 더 큰 믿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아진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군사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새로워졌기에 40년 전에는 가나안 땅 앞에서 두려워하던 이들의 뒤를 이어 이제 이방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짐을, 그러나 그들의 사명을 묵묵히 잘 감당해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세대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사명을 세대를 이어가며 이루어가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실패했고, 그들은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지만 다음 세대는 실패하지 않도록, 믿음을 가지도록, 꿈을 꾸도록,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그들의 꿈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계승한 다음 세대는 앞 세대의 실패를 거울삼아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이뤄냄으로 앞 세대의 꿈과 헌신이 헛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변할까요?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때로 진정한 변화는 한 세대라는 시간을 넘어섭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치가 오랜 세월 뿌리내리면서 한 신앙 공동체의 가치관과 문화가 바뀌게 됩니다.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가진 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교회도 잘 안다니는 것 같고 별로 믿음의 열정도 없는 것 같지만 사회적인 약자들을 배려하는 모습, 문화화되고 제도화된 그 사회의 면면을 보면 신앙이 한 사회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대에 이루지 못한 과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한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사명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앞선 세대의 후계자들이며 또한 다음 세대의 선구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과제를 이어받았고 또 어떤 과제를 물려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상속한 유산은 무엇이고 우리가 물려줄 유산은 무엇입니까?

광야의 백성들은 무엇을 물려주었습니까? 그들은 돈이든 명예든 무엇이든 성취한 것도 없고 물려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받은 사명을 물려주었고, 그들이 꾸었던 꿈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물려준 그 믿음, 그 사명, 그 꿈을 가지고 다음 세대는 실제로 가나안땅에 들어갔고 그 땅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복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사명을 알고 우리의 한계를 알고 살아가며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기대를 잃지 않고 이전 세대의 꿈을 실현해내며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물려주며 우리의 하루의 헌신을 묵묵히 감당해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우리는 의심하고 우리는 원망하고 우리는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우리가 못 다 이룬 꿈을, 우리가 못 다 이룬 사명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우리 가정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뿌리를 굳게 내리며 서로 화목하고 깊이 사랑하는 은혜로운 가정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가 더 정의로운 나라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서 행복한 나라가 되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와 번영이 이뤄지는 나라가 되는 꿈을 심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하며 복음 증거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역사를 이루어갈 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며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평화와 변영이 온 세상에 미치는 꿈을 함께 꾸고 이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주간도 우리가 물려받은 희망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우리가 못다 이룬 사명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삶의 진실된 걸음 걸음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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