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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의 최후 / 열왕기상 2:31-34

31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속의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인상을 받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는 선과 악이 그렇게 분명하게 나눠지지도 않고 기도한다고 늘 응답받는 것도 아니고 선하게 산다고 꼭 보상을 받거나 악하게 산다고 당장에 큰 벌을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보면 성경 속에 우리의 현실의 문제, 고민이 다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요압은 아마도 성경 속의 인물 중에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압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살아왔던 인물입니다. 그의 주군인 다윗에 대한 충성과 함께 또한 자신의 입지를 위한 계략이 공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압과 같은 사람의 생애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삶의 이런 현실적인 모습 때문에 뭔가 교훈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사람인데도 요압의 생애가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인정을 받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성경 속에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또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과 바울같은 뭔가 드라마틱하고 신앙적인 감동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요압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같은 삶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고 누구보다도 다윗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늘 요압은 스루야의 아들이라고 소개됩니다.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였기에 요압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윗과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스루야의 아들들로서 요압 외에 그의 동생인 아비새와 아사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다윗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또 큰 영향력을 가진 장수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에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잔당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이 요압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때입니다. 사울의 시대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다윗이 부상하면서 함께 영향력을 키워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과 요압의 특수한 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첫 번째 사건은 아브넬의 죽음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총애를 받던 군사령관이었는데 사실 이스보셋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놓고 자기 자신이 실제적인 권력자로서 다윗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몰래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에게 투항하기로 약조를 맺습니다. 요압은 이렇게 아브넬이 다윗과 만나고 무사하게 돌아갔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아브넬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개인적인 원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브넬은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장수였기에 그가 다윗에게 투항하고 다윗의 신임까지 얻게 되면 과연 이후에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돌아가는 아브넬을 만나자고 한 후에 그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사무엘하 3:39) 다윗이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어기고 살인죄를 저질렀으면 당연히 처벌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할터인데 다윗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요압이 그만큼 당시에 세력이 강하여 다윗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또 한편으로 요압은 다윗의 이중적인 의중을 잘 읽고 있어서 아브넬을 죽인 죄를 묻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사울 시대에 명성을 떨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계산되로 되었다면 그는 다윗이 이끄는 새로운 나라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다윗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아브넬을 죽입니다. 이제 아브넬이 없이는 이스보셋의 나라는 끝장난 것이나 마친가지가 되고 결국은 다윗이 모든 백성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아브넬의 죽음으로 다윗은 손해볼 일이 없고 오히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요압이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과 요압의 공생관계를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아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장수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아내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는데 밧세바가 임신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와서 아내와 동침하도록 유도했지만 강직했던 우리아는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자신만이 어떻게 집에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함께 지낼 수가 있겠느냐며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전쟁터로 돌아가는 우리아에게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는데 그 편지에는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는 명령이 들어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그 편지를 요압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 다윗은 자신의 숨겨진 이면의 추한 모습을 요압에게만큼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요압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이미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번에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요압을 통해 자신의 골칫거리를 해결하게 됩니다.

다윗과 요압의 관계가 좀 더 복잡하게 된 것은 압살롬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사랑을 받던 아들 압살롬은 점점 권력욕을 드러내게 되고 다윗과 갈등관게에 있게 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압살롬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야심가였습니다. 요압은 누구보다도 다윗이 압삼롬에게 가진 애증관계를 잘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드디어 반란을 일이켰지만 결국은 패하여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자신이 자랑하던 머리털이 걸리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장수들에게 압살롬을 해치지 말라고 당부했기에 그 상황에서 아무도 감히 압살롬에게 손을 대지 못했지만 요압이 와서 “지체없이” 창으로 압살롬을 찔러 죽였습니다.

어떻게 요압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압살롬은 나라로보면 반역자이지만 다윗으로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왕으로서는 반역자를 처형해야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을 감싸게 되는 다윗의 이중적인 마음을 알고 있는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죽여서 나라의 후환을 없애고 자신이 비난을 받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고 요압은 악역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요압에 대해 다윗은 점점 두려움을 느끼고 견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죽은 후에 다윗은 압살롬 편에 섰던 또 다른 자신의 친척인 아마사를 요압 대신에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으로 삼는 파격적인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을 죽인 요압에 대한 일종의 징계였고 요압은 이때부터 다윗과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바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다윗은 군대를 모병하고 통솔하는 역할을 아마사에게 맞깁니다. 이번에도 요압은 아마사를 찾아가 문안하는 척하며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합니다. 성경은 다윗이 이런 요압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다윗과 요압의 사이는 금이 가게 됩니다.

결국 다윗과 요압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아도니아의 반란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다윗의 의중은 솔로몬에게 있었지만 아도니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요압은 아도니아에게 붙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다윗에게 충성하던 요압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압살롬의 경우처럼 아도니야를 제거하는데 압장섰어야 했을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요압은 다윗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다윗은 지는 해였고 아도니야는 뜨는 해였습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노쇠하고 유약하여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아도니아와 솔로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요압게느는 다윗을 위해 충성함으로 그가 얻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요압이 마지막 순간에 다윗을 배신하고 아도니야의 편에 섰지만 다윗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고나서야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요압의 악행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대로 솔로몬은 반역자 요압을 처형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요압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요압은 충신입니까, 간신입니까? 배신자입니까? 요압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을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아서 다윗이 영광을 받고 존경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보기에 요압은 자기를 입지를 위해 살아간 사람일뿐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3장에는 다윗의 용사들 37명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 중에는 우리아의 이름도 있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름도 있지만 요압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 모두는 다윗을 위해 살다 죽었지만 요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요압에 대한 평가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모습도 사실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 선과 악의 문제를 접어둔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실을 위해 모든 것을 접어버립니다. 우리의 양심, 신의, 선한마음, 진실함을 우리는 현실의 이름으로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택하고 현실의 편에 선다해도 현실은 결코 우리의 편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상은 저 멀리 있고 현실이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도 우리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현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삶 그러나 그런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줍니까?

요압은 다윗을 위해 살았지만 다윗은 요압이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배신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현실을 따라 사는 우리의 모습이 요압과 같다면 우리의 끝도 요압과 같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의 계략과 치밀함과 과단성에 있어서 우리가 요압의 발뒤꿈치라도 따라 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과 함께 온갖 영화를 다 누렸던 사람, 그러나 다윗의 그늘 아래에 있었고 다윗을 위해 비열한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입지를 위해 불의한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다만 현실 뿐이라면, 그리고 그 현실에 맞추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면 과연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알아주고 우리의 편이 되어주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좀 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압의 인생을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가 요압의 인생이라는 거울에 우리를 비춰보면서 우리가 좀 더 영원한 것, 좀 더 가치있는 것,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그 무엇을 추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 분별하며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가치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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