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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기도 / 예레미야 20:7-13

우리가 앞에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명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두울 때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었던 위대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의 행적이 열왕기라고 불리는 역사서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 중에 그들의 이름으로 된 책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분류할 때에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구분을 합니다. 구약성경의 뒷부분에는 여러 선지자들의 글이 모여있는데 정작 저 위대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글은 없습니다. 선지자들도 활동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능력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기 때문에 굳이 그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에 예언서로 분류되는 16권의 책이 있는데 이 책들을 기록한 사람들을 문서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참 밋밋한 이름이기는 한데 문서로 예언을 기록한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전한 말씀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 그 책의 내용을 통해 이 글을 기록한 선지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예레미야도 그러한 문서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의 행적에 대해서는 열왕기 외에 또 다른 역사서인 역대기에 그런 선지자가 있었다는 한 두 줄의 기록이 있을 뿐 그의 자세한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모여있는 “예레미야서”라는 책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는 다른 선지자들의 글과 비교해볼 때에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칭의 시점에서 예레미야의 심정을 담은 글들, 기도문들이 다른 예언서들에 비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말씀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무개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틀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행적에 대한 부분적인 기록은 담겨있지만 그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지자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고뇌가 서술된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기록된 그의 육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거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이 아니라 심판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지만 백성들은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기보다는 그를 조롱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선포한 대로 나라가 멸망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선지자의 슬픔이 예레미야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선지자란 자신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선지자로서의 능력이 입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앞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고 그의 예언대로 3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가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에 다시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

예언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또 비가 내릴 것이라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게 하신 것은 비를 내리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냥 비를 멈추시거나 비를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게 하시는 것은 바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행하는 악한 일을 그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멸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냥 재앙을 내리시고 멸망시키시면 됩니다. 그러나 예언을 하시는 것은 그 재앙을 피할 길을 보이시는 것이고 경고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구약성경의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인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이 성읍이 멸망할 것이라고 요나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앗수르라는 나라를 매우 싫어했던 요나 선지자는 앗수르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거역하고 배를 타고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아니 앗수르가 망할 것이라고 전하라는데 신이 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앗수르에 가서, 니느웨에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받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예언이란 확정된 미래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영적인 상태가 지속될 때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미래를 보여주면서 지금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이 행하는 악한 일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에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고 선지자는 자신이 예언함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하지만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선지자의 슬픔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아 선지자의 고뇌에 찬 탄식을 들려줍니다. 그는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셨지만 어떤 능력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는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지만 예레미야는 단 한 건의 기적도 행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조롱과 핍박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고백은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된 것은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고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결과로 그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8절에서는 왜 그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저지르는 악행들을 드러내고 고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 땅에 임하고 이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언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예언을 조롱거리로 여기고 그를 모욕했습니다. 맨날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재수없는 놈으로 여기고 비난하며 손가락질 합니다. 그는 이 수모를 도무지 견질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비탄에 젖어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시키셔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인데 왜 사람들이 나를 보며 손가락질 하고 비방하느냐”는 원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선지자를 안하면 될 것아니냐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9절에서 자신의 또 다른 심경을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기에 그 것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마음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속된 말로 “내가 다시 예언을 하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그 결심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다가오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자니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속에 걱정이 되고 열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못하는 선지자의 심경을 절절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10절에는 더 답답한 상황이 묘사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사람들은 비판을 받으면 자신을 살펴보기 보다는 너는 뭐가 잘났는데 하며 되려 그 사람을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기분나쁘게 한 것 자체가 불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면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섭섭해하고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이면 그 의도를 짐작하고 계산하느라 바쁘고 상관없는 남이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소리를 높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만 할 말이 있는줄 아느냐 우리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이고 비난거리를 찾아내며 흠집을 만들어서 망신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는 말은 지도 사람인에 별수 없이 실수를 할 때가 있을 테니 그때에 그동안 당한 것을 다 갚아주자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아무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비난이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지금 예레미야가 그의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선지자도 연약한 인간이었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도를 묵상하는 것은 기도의 언어를 배우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도는 어떤 일정한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결국 다 주시옵소서가 되어 버립니다. 감사기도로 시작해도 결국은 주시옵소서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기도모임에 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기도회가 끝나고 묻드랍니다. 사람들이 다 “쏘서, 쏘서 쏘서”하고 기도하는데 쏘서가 모슨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더 다양한 기도의 언어들이 나옵니다. 간구하는 기도 외에도 때로는 탄식하고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또 감사하고 찬양하며 기쁨의 기도를 드립니다.

예레미아의 슬픔과 원망과 탄식은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신뢰에서 나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며 우리의 진심을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의 마음의 고통을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에게 사명의 짐을 지워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지만 그는 또한 그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실 분도 하나님뿐이심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그의 상처와 아픔과 울분을 토로하며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도 아니고 그렇게 대단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결코 우리의 삶의 짐은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고 싶지 않아도 지어야 하고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는 우리의 인생의 짐과 우리의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어지는 일들, 벌어지는 일들을 뒤치다꺼리 하는 데에도 정신이 없습니다.

수요예배 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난주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책이 출간 되었을 때에도 많은 관심과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고 영화화되어서도 계속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상을 남들처럼 살아가려고 할 때에도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 있고 마음에 담아 놓은 상처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형제로서, 자매로서, 직장에서 상사로서, 또 부하직원으로서, 혼자 살면 혼자 사는대로 같이 살면 같이 사는 대로 우리는 일상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요구되는 짐을 지고 가기에도 참으로 버거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우리 사회에 서로를 향한 공감과 위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힘들다고 할 때에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나도 이렇게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공감해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서로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면 삶의 짐이 더 가벼워질 수 있을텐데 비난하는 소리는 있어도 공감과 위로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가 이미 지고 살아가는 짐이 있기에 누군가의 한숨 소리를 받아주기에도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아서 옛 속담처럼 혹떼러 갔다가 혹붙이고 온다고 내 하소연을 하려다가 오히려 갈등이 빚어지게 되고 그야말로 누군 안 힘든줄 아느냐, 왜 너만 위세냐 하는 소리에 더 상처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공감과 위로를 기대할 수 없으면 우리의 상처와 좌절과 아픔은 점점 더 깊이 우리의 마음 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오늘날 그것이 마음에 쌓여서 마음의 병이 됩니다. 때로는 사회적인 분노가 되어 폭발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꼭 무엇을 더 얻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제목이라는 것이 내가 무엇을 더 얻고 나와 내 가족이 더 잘되기를 구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만해도 좋습니다. 아니 이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 마음을 돌아보고 또 내 가족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고 또 위로를 나눌 수 있기를 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탄식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13절에서 그는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불의한 세상에서 의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또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더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자리에 서서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무거운 것을 무겁다고, 두려운 것을 두렵다고 고백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잔소리는 세상에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잔소리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꾸미며 겉치장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에 근심과 염려와 슬픔이 가득차고 회의와 실망과 불신이 몰려오더라도 우리는 좀처럼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탄식과 불안을 내어놓지 못한다면 도무지 교회는 왜 존재하고 신앙의 공동체는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치장하고 잘난척 할 수 있는 모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공동체가 하나 더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근심과 염려와 슬픔, 우리의 불신과 불안까지도 내어놓고 서로 위로하고 또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될 때에 교회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탄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또 선지자이기에 그의 탄식은 더 깊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의 한숨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언어가 더 진실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마음의 깊은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고 우리의 주위에 함께 기도하며 위로하는 믿음의 동반자들이 있어서 함께 위로하며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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