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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 사무엘하 7:20-29

우리는 그동안 인생의 7가지 과제라는 주제로 다윗의 인생을 거울삼아서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왔습니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가족, 친구, 사랑, 건강, 재정, 자존심, 이렇게 6가지 주제를 가지고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며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주는 교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다윗의 인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 거리는 훨씬 더 많습니다. 앞으로 다른 기회에 이번에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다룰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래도 이 이야기는 해야 되겠다 싶은 사건 한 가지를 먼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블레셋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안위를 의탁했던 사건입니다. 왕이 되기 이전에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윗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가기 시작했고 다윗은 점점 더 불안해졌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을 피해서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다는 절박감속에서 급기야 다윗은 우리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블레셋으로 피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은 당시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었고 역사적으로 좀 더 젊잖게 표현하자면 가나안 땅의 지배권을 놓고 이스라엘과 각축을 벌이는 세력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쫓아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블레셋과는 당연히 지속적인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소위 “적의 적은 동지다”라는 공식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이기 때문에 사울의 적인 블레셋에게는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 더 이상 이스라엘 지경 안에서는 피할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블레셋이 사실상 거의 유일한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어떤 나라입니까? 바로 다윗이 명성을 얻게 된 계기를 제공한 골리앗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곳으로 다윗이 제발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대담한 발상이며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승부수가 블레셋 왕에게 통하게 됩니다. 블레셋 왕의 입장에서 장차 다시 한 번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게 될 때에 가장 부담이 될수 있었던 존재가 바로 다윗이었는데 다윗이 제발로 자신에게 투항하러 왔다는 것이 그를 상당히 고무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주어서 그 곳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살게 하며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이렇게 블레셋 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기에 자신의 계략이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 왕이 정말로 다윗이 자신에게 투항했다고 믿었다는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 블레셋 왕은 이스라엘을 향한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신과 함께 이 전쟁에서 선봉에 설 것을 요구합니다. 당연히 사울 왕과 원수가 되었기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니 사울 왕을 치러가는 전쟁에서 함께 싸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다윗에게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위기였습니다. 만일 여기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이 블레셋 왕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러가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지키고 구원할 사람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군대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블레셋과 손을 잡고 먼저 사울의 세력을 타도한 다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수순을 밟고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당시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블레셋에게 큰 신세를 지게 되고 다윗의 통치 기간 내내 블레셋이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백성들의 입장에서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이었다고 한들 과연 블레셋 편에 붙은 다윗의 변절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은 도저히 이스라엘을 치러가는 데 합세할수 없다고 말하면 지금까지 블레셋 왕에게 입에 발린 말들로 충성을 맹세했던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어 바로 여기서 배신감을 느낀 블레셋 왕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상황은 다윗으로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버린 형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다윗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블레셋의 장군들이었습니다. 블레셋 왕은 아마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어서 다윗이 자신에게 이제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고 진짜로 믿었던 것 같지만 블레셋의 장군들은 다윗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전쟁에 나가게 되면 다윗이 사울왕의 환심을 사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블레셋 왕에게 격렬하게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은 자신은 다윗을 믿는데 부하장수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데리고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며 미안해합니다. 다윗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쉽게 되었다는 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이 난처한 처지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참으로 다윗이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초래한 위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던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한 번 벗어날 길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보는 것처럼 다윗은 어떤 면에서 보면 참으로 지략이 뛰어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둔한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돕는 손길을 주셔서 위기에서 번번이 구해주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에게 여러 가지 탁월한 면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것처럼 다윗에게도 많은 허물이 있었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의한 모습마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이 나라를 굳건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앞으로 세워질 성전의 건축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명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를 나타낼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애굽이라는 강한 나라의 손에서 이 연약한 민족을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시고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맡기시며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을 깨닫게 하시며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 민족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다윗이라는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다윗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일까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무공을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삼국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우나 장비나 조자룡도 다윗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전설적인 영웅담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크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 시간들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윗의 가장 탁월한 업적 중의 하나가 전쟁터에서 거둔 승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좀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사실 다윗이 정복한 영토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성경의 이야기에 익숙해서 그렇지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당시의 고대 중동지역의 역사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영토는 면적으로 따지면 2만평방미터정도 되는데 한반도가 아니라 남한의 면적의 5분의 1정도입니다. 물론 다윗의 시대에는 이보다는 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 시절의 영토도 남한의 절반 정도, 대략 강원도와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한 왕들은 인류의 역사에 세고 세도록 많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이름을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무용담이나 왕으로서의 군사적인 업적 때문이 아니라 바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1장 1절에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예수님이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인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다윗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성경의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이 오셨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이렇게 수십억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섬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예수믿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윗이라는 존재는 지금 지구상에 2천만도 되지 않는 유대인들만이 기억하는, 그들의 역사의 고대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낯선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7장은 그런 의미에서 왜 다윗이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웃나라들을 평정하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온 후에 다윗은 또 하나의 소원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것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짓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다윗은 성전을 짓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그의 생각을 당시에 다윗을 돕던 선지자 나단에게 이야기했을 때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의 다윗으로서는 다 이해하기 힘들 놀라운 은혜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앞에서 감동을 받으며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과, 자신의 집안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이루시려는 뜻에 대해 감격하며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담당한 사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나라로서 그 기초를 놓았던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이 땅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위해 많은 허물이 있었던 다윗을 들어 쓰셨고 다윗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이러저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늘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은 결코 위인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펼치시는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며 그 속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삶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시대에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왜 이 자리에 함께 모여있는 것입니까? 다윗의 시대로부터 3000년이 지난 이 21세기의 전반부에 이스라엘로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에서 지금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배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들은 어떤 사명을 받아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윗이 아니니까 무슨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그저 우리들의 인생의 작은 만족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확행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사실 오늘날 우리는 무슨 거창한 사명같은 것을 별로 원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심지어 대단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거창한 사명, 비전에 대한 환멸을 공유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민족이니 역사니 정의니 평등이니 사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너무나 많이 경험을 했고 또 그러한 거대한 비전을 외치던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를 이미 경험을 하고 또 역사를 통해 배워온 세대이기도 합니다.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인류의 역사에서 19세기와 20세기는 가장 거창한 주의, 이념들이 추구되었고 또 그만큼 큰 고통을 겪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식민주의, 백인우월주의, 인종주의, 군국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사명으로 추구하던 사람들간의 각축과 대립과 갈등이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던 역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가 그러한 20세기의 역사의 상처가 가장 깊게 남아 있는 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사명이니 비전이니 주의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남에게 피해나 주지 않고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시며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가 기대하건 기대하지 않건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뜻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가 어떤 사명을 가진 세대인지를 우리 스스로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훗날 여러 세대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 지금 우리 시대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중요한 사명을 맡은 시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에 20세기 초의 10여년의 시기가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부터 1919년 삼일운동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복음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새겨졌고 고난당하던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꾸었고 많은 민족의 선각자들이 교회를 통해 배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이 2019년을 후대의 역사는 무엇이라고 기록하겠습니까?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이상 민족의 소망이 되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이 땅에 떨어지며 각처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리기 시작했던 해로 기억이 되지 않을까요? 한때는 세계의 10대 교회 중에 몇 개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가장 큰 장로교회, 가장 큰 감리교회가 다 우리나라에 있다고 자랑을 했었는데 어느새 그런 교회들이 부끄러움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집안마다 내려오는 복음의 전설들, 우리의 할아버지, 우리의 할머니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우리가 예수믿는 집안이 되어 우리 집안이 일어섰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서, 이 사회가 일어서고, 이 나라가 일어섰던 그런 기적같은 이야기들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이제 우리 세대는 복음을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데 실패한 첫 세대로, 그렇게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세계적인 선교의 대국으로 세계 곳곳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철수하는 곳마다 헌신된 한국인 선교사들이 바톤을 이어받아 눈물과 기도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회를 세워온 놀라운 이야기들이 다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선교의 열정도 사라지고 복음을 위한 헌신과 도전도 사라지고 그저 교회 안에는 안일과, 냉소만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기록되지 않을까요? 

지금 청년사역을 하는 분들에게는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버린 숫자가 있습니다. 지금 대학생들 중에 그들의 내면의 신앙이 어떠한 지까지는 따질 수도 없고 어찌되었든 간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이 5%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숫자는 여러 가지 통계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5%, 이것이 아마도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상징하는 숫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대했던 이 땅의 복음의 역사의 마지막 장을 기록하는 그런 세대, 우리의 뒤에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 것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다윗의 시대만큼이나, 어쩌면 다윗의 시대보다도 더 중요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도전이라는 것, 위기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시대의 사명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서있는 자리, 그곳은 여러분들이 깨닫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자리입니다. 한 집안 한 집안의 이야기, 가족들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가 있는 바로 그 자리, 우리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겪어가면서도 끝까지 지켜내었던 그 선교의 자리, 여러분들이 속해있는 지역사회, 직장, 학교, 공동체, 그 어디에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양심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려고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 새가족 한 사람을 영접하며, 주일학교 어린 학생들 한명을 끌어안고 기도하며, 우리의 개인의 여러 가지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기며 지키고 있는 바로 그 자리, 매일 매일 캄캄한 새벽을 깨우며, 수요일마다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지키는 그 기도의 자리, 진실된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한 찬양을 올려드리며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바로 그 자리, 그 모든 곳이 이 위중한 시대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이며 충성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도도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아닌 냉소, 기대가 아닌 환멸, 헌신이 아닌 무관심의 시대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복음의 최전선에서 끝까지 버텨내며 더 나아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내야 하는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나의 인생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가, 이 나라가, 이 민족이, 이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기뻐하고, 가슴벅차하고, 다시 꿈을 꾸고, 다시 희망을 찾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뜨겁게 찬양하고, 다시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의 열정, 선교의 헌신으로 새로워지는 그런 반전의 이야기, 역전의 이야기, 새로운 부흥과 도전의 이야기로 바뀌어야 하는 바로 그 위대한 사명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이미 그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는 이미 그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창한 비전, 사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처럼 우리를 부르셨고 다윗처럼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흠이 많고 실수하고 연약하고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확신도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비겁하지만, 그런 우리들 하나하나를 하나님은 부르셨고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에게는 위대한 영웅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다윗도 많은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연약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우리의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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