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교회 :::
현대교회 로고
신앙으로의 초대 현대교회 이야기 예배와 모임 나눔과 섬김 참여와 헌신
예배안내 양육과정 안내 매일묵상 교회학교 목장안내


서브메뉴 안내 - 섬기는 이들


댓글 0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기도 / 창세기 18:23-33

오늘부터 기도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올해 설교계획을 세우면서 작년까지 별도로 성경공부반에서 공부했던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주일 설교시간에 다루기로 했습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의 근간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토대를 바르게 쌓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고 외워야 하는 것인데 성경공부반에 참여하실 수 있는 분들은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공부반에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도 신앙의 기초를 점검하고 신앙의 근간을 세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반기에 먼저 사도신경을 통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요약이며 성부, 성자, 성령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의 내용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이번 가을에는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원래의 계획은 주기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강해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사도신경과 중복되기도 쉽고 우리의 실제적인 기도의 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도의 사람들이 드린 구체적인 기도문들을 그들의 삶과 함께 연결하여 살펴보고나서 마지막에 주기도문의 의미를 설명하며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들게 되는 염려가 있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듣고 배우기만 해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기도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실제로 기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기도가 어렵게 느껴져서 더 기도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학교에서 책으로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6년을 배워도 외국사람 만나면 말 한마디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태원에 가보면 가게에서 물건을 파시는 분들이 몇마디 안되는 영어를 가지고도 장사를 잘만 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 영어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축구에 대해, 야구에 대해 책에서 아무리 배워도 공이 발에 맞지 않고 공이 배트에 맞지 않습니다. 운동장에서 많이 뛴 사람들이 감각을 가지고 경기를 잘 풀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듣어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무조건 기도를 많이 한다고 기도를 잘하게 되고 바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도 처음에 제대로 자세를 배우지 않고 잘못된 습관이 들면 나중에 고치기도 힘들고 더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좀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또한 가능하면 기도의 실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목장 모임에서도 사도신경을 공부할 때에는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면서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 필요했었지만 이번 학기에는 가능하면 서로 마음을 터놓고 기도제목을 이야기하고 실제로 함께 합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각자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서 실제로 여러분들이 기도를 연습하고 더 깊이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를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생각대로 이루기를 원하는 갈망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만 읽고 기도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성경을 통해 배운 것은 2천년전, 3천년전의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여기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신앙, 체험적인 신앙, 능력있는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나의 삶의 기준으로 삶으며 살아가는 것과 그렇게 살아가기에 한 없이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절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과거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교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만 읽는다고 성경의 진리가 다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 진리대로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고 좁혀가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반복해서 되뇌이면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저열한 현실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약속,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사이에서 거룩한 줄다리기를 하며 점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내가 끌려가는 것을 경험하는 은혜의 체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줄다리기를 한다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이기시겠죠. 그런데 우리는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도라는 줄다리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을 끌어오지 못하면 내가 졌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면 내가 하나님 쪽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져야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진정으로 영적인 줄다리기를 하는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줄다리기는 내가 하나님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줄다리기가 아니라 결국 내가 하나님께로 끌려가는 그런 줄다리기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우리가 조금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이 안에는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며, 그러면서 기도의 본질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놀라운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읍의 죄악됨을 보시고 불로 심판을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매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시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원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시대가 우리시대보다 더 근원적이고 모든 제도로부터 자유로우며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율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습니다. 제사장같은 사제계급도 없었고 어떤 종교적인 형식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현대사회의 종교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영어의 Privatization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개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전근대사회에서 종교는 전통, 권위, 제도, 공동체, 국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어떤 종교를 갖는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종교가 결정되는 것이었고 그때의 종교는 개인의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 민족, 국가, 제도, 전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점점 종교를 개인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한 나라 안에서뿐만 아니라 한 가정 안에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게 되고 일종의 개인의 기호, 취향처럼 변해버린 것을 종교의 사사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이러한 종교의 개인화 현상은 현대사회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우르, 하란, 가나안땅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예외가 딱 한 사람 있기는 합니다. 그 사람은 멜기세댁인데 이 사람도 아브라함 만큼이나 놀랍고 신비한 인물인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멜기세댁 말고는 아브라함이 말이 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할 만큼 아브라함의 신앙은 개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신앙이 한 가정의 신앙, 한 집안의 신앙, 한 민족의 신앙이 되었다가 온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의 개인적인 측면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는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4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8절)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친구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소중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용해서 야고보서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천년전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이 사람은 나의 친구야라고 부르시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친구사이라고 할만큼 개인적이고 친밀한 영성이 이미 그 시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아브라함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과 친구사이가 어떤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조금 앞에 있는 창세기 18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좀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면, “아무리 그래도 내 친구 아브라함한테는 이야기해줘야겠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데 대학을 가고 나서 몇 번 만나다가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끊어져서 지금 서로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저에게 그 친구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연락을 안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그래도 너는 알 줄 알았는데”라고 말을 해서 제가 참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친했는데 어떻게 소식을 모르냐는 것이지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에게는 이야기를 해야지, 그런 관계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였고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원형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친구로서 아브라함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에 대해 대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23절부터 25절까지를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정의롭게 심판하셔야지 그렇게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을 다 한꺼번에 멸하시는게 말이 됩니까?”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소돔성에 의로운 사람이 50명이나 있다면 어떻하시겠나고 마치 따져묻듯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런, 어떻게 보면 우리로서는 참 버릇없어보이는 이런 반응에 대해서 그대로 아브라함의 생각을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다시 말하자면 그래 네 말대로 정말 소돔에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으면 다 용서하고 심판하지 않을께 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도 앞에서는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자신을 매우 낮춥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라고 기도하며 오히려 요구 조건을 더 까다롭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번에도 아브라함의 요구를 받아주십니다. 이렇게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이르기까지 같은 이야기가 반복이 됩니다. 한번도 아니고 6번이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요구를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자주 나오는 반응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신 것인데 기도해서 무엇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우리의 선입관이며 우리의 관념입니다. 기도의 실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기도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꾸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도 이와 같은 예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말씀드리면 얼마전에 수요예배때에 말씀드린 것인데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령을 하셔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구워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또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게 될 비참한 고통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에 여기에 토를 답니다. 내가 그래도 제사장 출신으로 정결하게 살았는데 도무지 인분으로 불을 피우는 그런 부정한 짓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면 소똥으로 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인분이나 소똥이나 그게 그것 같지만 소똥은 오늘날에도 중동지역에서 일상적인 연료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요구를 들으시고 원래 선포하게 하시려던 메시지의 강도를 낯추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레짐작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다고, 그런건 요구해봤자라고 생각하고 단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무조건 우기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지하고 진심어린 간구를 결코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셨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식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라온 유교문화속에서 아버지와 자녀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엄부자친이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엄격하셨고 또 자녀된 도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배워왔던 것이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좀 멀리 느끼고 함부로 우리의 속내를 이야기하고 무언가를 요구해서는 안되는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구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관계의 내용이 좀 달라지겠지요. 죄송하지만 제가 저희 집안 이야기를 드리자면, 저희 집안은 좀 다른 집안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습니다. 혹시 오해가 있으실까봐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부자간의 관계가 다른 집안보다는 훨씬 더 친밀합니다. 저는 그것을 잘 못느끼고 있었는데 언젠가 제가 친구와 같이 있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옆에서 듣다가 누구냐, 형이냐, 하고 묻길래 아니 우리 아버지라고 말했더니, 아니 너는 아버지랑 그렇게 이야기하냐 하고 놀랬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무섭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지만 제게는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형과 같고 친구같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저희 집안의 분위기가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식은 제가 하나님을 다른 성도님들보다 더 친밀하고 가깝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제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제 일상의 경험이 영향을 미쳐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형식적이고 어떤 틀에 박힌 것이 아니라 더 솔직하고 친밀하고 그야말로 어디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나의 모든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요구를 받아주셔서 소돔성을 심판하시는 기준을 50명에서 10명까지 낮추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럼 왜 아브라함은 자꾸만 기준을 낮추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에 하나님이 소돔성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아니 소돔에 얼마나 착한 사람이 많은데 그 성읍을 멸하신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든 생각은 적어도 50명은 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꾸만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기 생각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돔에 의인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50명이 안될지도 모르지, 아니 40명도 안될지도 몰라, 아니 그래도 10명은 있겠지, 이런식으로 아브라함의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소돔성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부당하게 느꼈는데 기도하다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브라함이 점점 더 깨닫게 되고 사실 아브라함의 생각이 바뀌어 간 것입니다. 결국 소돔에는 10명의 의인도 없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앞에서 기도는 일종의 줄다리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누가 이긴 것일까요?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이긴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끄는 쪽으로 따라가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끄시는 쪽으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소돔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바로잡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투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모든 만남에는 상호성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 백가지 생각을 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미숙하고 출발점이 잘못되고 불완전해도 기도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우리 기도를 들어주심을 믿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에 경청을 하시지만 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의 내용도 점점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도하면서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런 것이 없이도 살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고 오히려 내가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게 되는 일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향해 자신의 갈망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이라는 대상과 만나는 그런 은혜로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바로 나오지는 않지만 한 가지 중요한 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아브라함이 열 명까지 조건을 바꿔가면서 까지 소돔에 대한 심판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돔성에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그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면 아브라함은 대단히 객관적이고 공의로운 사람으로, 마치 하나님보다도 더 의로운 것 같이 소돔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께 정의의 원칙을 따지며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롯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번도 오늘 본문 속에서 롯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소돔성은 안되요, 거기는 롯이 사는 곳이 아닙니까? 저같으면 이렇게 기도할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그래도 믿음의 조상 답게 매우 쿨하고 객관적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의 속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부터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거기 롯이 사는데, 그러면서 앞에서 본 것처럼 50명, 40명, 30명하고 조건을 낮추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입술로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소돔성에서 롯의 가족들을 먼저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나서 소돔성을 멸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다 받아주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불의하고 타락한 성읍 소돔성을 심판하심으로 역사에 교훈을 남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조카 롯의 생명을 구해내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소위 요즘 말하는 대로 윈윈이 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고 아브라함의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에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기도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가을에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 진심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을 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주일 설교 영상   ADMIN 2020.04.19 31
공지 매일묵상 안내   ADMIN 2017.03.11 220
148 2019.11.3(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11.03 57
147 2019.10.27(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10.27 30
146 2019.10.20(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10.20 25
145 2019.10.13(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10.13 25
144 2019.10.6(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10.06 38
143 2019.9.29(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9.29 20
142 2019.9.22(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9.22 22
141 2019.9.15(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9.15 26
140 2019.9.8(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9.08 24
» 2019.9.1(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9.01 21
138 2019.8.25(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8.25 34
137 2019.8.18(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9.08.18 18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Next ›
/ 16
Designed by hikaru100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