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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중보자 모세의 기도 / 출애굽기 32:30-35

우리가 성경 속에서 기도의 모델을 찾아보고자 한다면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모세입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을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 대해서도 신명기 마지막 장에 모세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면서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기록되어 있고 출애굽기 33장에서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얼굴과 얼굴을 가까이 대하며 이야기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이야기할 때에 모세만큼 그 정의에 충실한 관계를 하나님과 가졌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앞으로도 기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겠지만 모세는 그의 사명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선 존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모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것이거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들입니다.

모세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보자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보(仲保)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말이라서 사전에도 기독교 용어로서 “신(神)과 사람의 사이를 화해시키고 교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풀이를 덧붙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중보기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셔서 중보자의 역할을 지우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중적인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지만 이집트의 왕실에서 자라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중재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사명감, 혹은 책임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노예들을 위한 대변자의 역할을 자처하다가 그만 애굽사람을 쳐죽이게 되고 그래서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보낸 후에 그는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이집트의 왕과 담판을 짓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의 그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서 백성들을 이끌며 또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모세의 삶은 이렇듯 경계에 선 사람, 양 측의 가운데 선 사람으로서 중보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모세에게도 개인의 삶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가정이 있었고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에게 부여된 사명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의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간략하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생활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모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모세는 후에 이방인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다시 맞아들이게 되었던 것같습니다. 이것이 당시에 이야기 거리가 되고 비방거리가 되었던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도 일종의 개인의 삶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성경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할만큼 친밀한 관계였다는 모세가 자기 개인의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부여된 역할이 결코 모세에게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맨날 만나만 먹는다고 불평을 터뜨리며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왜 나에게 맡기셔서 나보고 먹여살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 나를 택하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원망하는 모세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모세로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고 사실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모세의 기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의 하나는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왔을 때에 이에 맞서서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다가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패하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곁에 있던 아론과 훌이 모세가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도록 모세가 앉을 수 있는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히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두 사람이 옆에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온종일 받쳐 들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그만큼 중보기도가 중요하고 현장에서 싸우고 일하는 것만큼이나 기도하며 돕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대부분의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갈등 사이에 중재자로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세상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시려는데 백성들은 그들이 나온 애굽땅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가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문화와 삶의 방식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이루실 구원의 계획 가지고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만 백성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외에는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그 사이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설득하고 백성들을 꾸짖고 아슬아슬한 위기의 연속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모세의 기도 중에서도 매우 극적인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진노하시며 이 백성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하나님의 노를 진정시키며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까이 가서 정탐꾼들을 보냈는데 그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가는 다 죽게 생겼다고 악평을 할 때에 또 백성들이 원망하며 여기서 죽느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이 백성들을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일으키시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로우신 성품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이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들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인 모세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달래고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행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은 우리가 앞에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았을 때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닙니까”라고 마치 하나님께 따지듯 기도하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본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우리의 편견과 상식을 깨뜨립니다.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마치 한 사람의 성난 어르신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을 달래드리기를 원하시고 정성껏 간청하면 못이기는 채하시며 뜻을 돌이키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전능하고 거룩하고 완전한 신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감정적이 되고, 의지와 계획을 바꾸는 것은 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신에 대한 이미지, 개념,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신뢰할 만한 기준이 성경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신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근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고 깨닫고 경험해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은 결코 어떤 철학적, 개념적, 원리적인 어떤 무념무상적인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슬퍼하시고 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장면에 등장하는 모습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구약성경 66권을 읽어나가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이 깊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이 크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다 헤아릴수 없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며 인도하시는 크신 은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그런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와 소통하시며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와 진노와 기쁨을 성경에서 보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만나주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들을 다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가 이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도 이 백성들이 만든 우상을 보고 엄청나게 분노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버릴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하나님이 적어주신 십계명 돌판을 내려놓고 화를 내든 뭐하든 해야 할텐데 이런 놈들한테 하나님의 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을 해서 그랬는지 그 소중한 돌판을 내던져 버릴 만큼 흥분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오히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분노를 내려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간구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식구들 중에 누가 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돌아와서 이야기를 할 때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느냐, 그러게 조심을 해야지 하며 잔소리를 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서운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걸 모르는게 아니라 오늘 속상한 일을 당했으니까 그냥 속상하다는 것을 받아달라는 것인데 거기에다 대고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따지고 있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속이 상하고 서로 목소리가 높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누구냐고, 당장 가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다고 더 흥분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니 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건 아닌데... 하면서 말이 좀 달라지게 되고 그냥 괜찮다고 말하면서 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를 보면 그런 느낌을 받곤 합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모세가 달래는 것 같지만 사실 모세도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못지않게 분노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모세는 다시 백성들의 편으로 돌아가고 백성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들을 위한 자신의 사명을 다시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세와 같은 한 민족을 어깨에 짊어진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짊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러나 또한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을 함께 받고 살아갑니다. 부모님, 형제자매들, 자녀들, 배우자, 친구들, 이웃들, 동료들, 제자들, 스승들, 고객들, 상사들 부하 직원들, 또 교회에서는 성도들과 우리는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돌보고 섬기며 일정한 관계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고 그러기에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가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하는 관계들의 몫이 있습니다. 그 모든 관계들이 바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때로는 내가 왜 이 짐을 져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답답하고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우셨다면 하나님은 그 짐을 통해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원망할 수도 있고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하시지만 하나님이 지우신 짐을 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원망과 불평은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우리가 힘겨워할 것을 아십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척할 것 없고 잘난척하며 살아갈 것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힘겨워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들고 넘어지려 할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힘겨움을 아뢰고 감당할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벗어나고 싶은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게 될 때에 만일 그 짐이 하나님이 지우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짐을 내려놓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짐을 내가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 짐을 함께 져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힘겨워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는 짐이 되는 인생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지금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고 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며 힘겹더라도 내려놓지 않고 내 인생을 떠받쳐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희생과 정성이 있었기에 지금 나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또 이제 나도 누군가를 위한 짐을 지고 내가 받은 희생과 정성의 몫을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은혜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지금 하나님 앞에 모세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하심 이전에 모세 자신도 놀라고 당황하고 분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의 어러석고 악함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또 당연히 분노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시지만 또한 연약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위해 자신을 택하셔서 중보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기도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합니다. 이 민족을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는 엄청난 희생의 결단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백성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이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나는 죽어도 좋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정말로 깊은 차원을 보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를 버리는 기도, 나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나보다 하나님을 더 높이는 기도,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가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중보자가 되셔서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그 분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지금도 구원의 역사, 중보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과 설교와 목장모임 자료에는 중보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최근 교계에서는 사람을 가리켜 중보자라고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시기에 우리가 감히 그 자리에 서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말 대신에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바꿔 불러야 된다고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우리를 위한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 우리가 중보자의 사명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용서하시며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사역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함께 동참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유일한 중보자가 되셨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이웃들을 향해 다가가서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우리의 가족일수도 있고 성도일수도 있고 가까운 이웃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전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일으켜주며 도전하고 가까이하며 은혜의 통로, 사랑의 통로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들 각자의 삶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고 그 짐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 열심히 산다고, 나 혼자 잘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아야 내 인생도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이 또한 기도로 맺어진 관계들이 될 때에 이 모든 관계들은 우리에게 축복의 관계가 되고 은혜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기신 기도의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는 은혜와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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