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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 사무엘하 16:5-14

다윗의 인생에서 다윗을 힘들게 했던 여러 가지 위기와 사건들이 있었지만 성경에 기록된 분량으로 보나 다윗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나 제 개인적인 생각에서 보나 가장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던 사건은 압살롬의 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이 되기 이전의 다윗의 고난은 그래도 소망이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잘 이겨내면 사무엘을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처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은 그 목적을 향한 연단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생에서 위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이야기를 했고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의 위기는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를 맺은 사건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분량으로만 생각해보아도 이보다 더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의 기록인 사무엘하는 모두 24장인데 밧세바 사건에는 2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압살롬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7장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많은 인기를 누렸고 또 다윗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압살롬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누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다윗은 아들의 공격을 피해서 수도인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때 다윗의 심정이란 어떠했을까요? 아들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가야 하는 신세라면 자신이 왕이라는 것, 이스라엘의 영웅이라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데 다윗의 인생에서 정신적인 면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스스로 가장 비참하게 여기며 가장 고통스러우며 가장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을 때가 바로 이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이 다윗의 딸이었던 다말에게 연정을 품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성경의 표현을 보면 배다른 남매간에 사랑의 감정을 갖는 것을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암논이 다말에 대한 가진 감정이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이 되어서 다말을 강제로 성폭행하는데 이르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더더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리고나서는 마음이 변해서 다말을 내어쫓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압살롬이 등장합니다. 압살롬은 다말의 친오빠였습니다. 즉 압살롬과 다말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매였습니다. 압살롬은 누이의 상처와 고통을 보면서 형인 암논에 대해 분노하고 복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려놓고 암논과 다른 다윗의 아들들을 초대하고는 암논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후 그의 부하들을 시켜서 암논을 죽여버렸습니다. 다윗은 큰 충격을 받았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일단 이스라엘을 떠나 도망을 갔습니다. 압살롬의 어머니는 그술이라는 나라의 왕 달매의 딸이었기에 압살롬은 바로 그술 땅으로 도망을 가서 아버지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립니다. 

아들이 딸을 범하고 또 다른 아들이 그 아들을 죽이게 되고,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만으로도 다윗의 집안은 막장중의 막장으로 치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다윗의 흉을 보게 되었지만 다윗의 집안에서 벌어진 이런 일들은 해도해도 너무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벌어진 뿌리에 다윗이 저질렀던 부정한 일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윗도 자신의 부당한 사랑의 감정을 따라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계를 맺었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을 교사하기까지 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런 비극적인 일을 보면서 속으로 자신의 책임을 느끼고 자기 자신의 탓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다윗의 자책감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다윗은 이 사건에 대해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문제를 사실상 더 악화시킵니다. 분명히 압살롬은 살인자입니다. 그것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왕국의 왕자, 그것도 다윗의 장남을 죽인 대역죄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표현이 참 이상한데 사무엘하 13장 39절을 보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이 좀 이상할 수도 있어서 새번역으로 보면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좀 다른말로 하자면 어차피 이미 암논은 죽은 것이고 다윗에게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사람이 아니라 장남이 죽은 마당에 더욱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인간적인 연약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왕으로서는 나라의 법도를 세워야 하겠지만 자기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해결사를 자처한 사람이 바로 요압입니다. 우리가 “친구”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요압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요압은 다윗의 누이의 아들, 즉 다윗의 조카이면서 다윗의 군대장관이며 다윗의 최측근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데려오고 싶어하지만 그가 지은 죄 때문에 데려올 명분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여인을 불러서 다윗에게 가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것처럼 꾸미게 하고는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시킵니다. 자신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다가 그만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게 되었는데 온 집안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남은 아이를 죽이겠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완전히 대가 끊어지게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다윗에게 간청을 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다 요압이 꾸민 일임을 알아챕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면 결국 다윗이 자신의 후계자로 당시에는 압살롬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것을 요압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불러서 네가 이일을 꾸며서까지 내 마음을 돌리려 하니 그러면 가서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 대신 압살롬을 다시 만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이년이 지나도록 다윗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항의를 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이게 뭐냐고, 내가 잘못이 있으면 나를 죽이시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나를 만나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또 요압이 개입해서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게 되고 서로 화해의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그다지 의로운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정안에서의 부자간의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이 되면서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다윗의 고민이라면 한편으로 압살롬이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압살롬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압살롬을 처벌하거나 내치지도 못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요압의 중재에 마지못해 끌려가게 되었던 그런 식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다윗과 화해를 한 후의 압살롬의 행보를 보면 이제 아버지를 완전이 종이호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나약한 존재라고 확신을 하며 이제 노골적으로 그동안 감추어 왔던 자신의 야망을 드러냅니다. 이 후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 원래부터 압살롬의 계획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인 다윗의 장남을 다말의 사건을 핑계로 제거한 것이고, 이제 두 번째 장애물인 아버지만 제거하면 되는 것인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망과 위세의 그늘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데 다윗의 우유부단한 모습과 자신에 대한 연민을 보면서 더욱 다윗이 별것 아니라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식의 허물을 용서해주는 큰 결단을 내린 것이지만 그것이 압살롬에게는 다윗이 자신을 제어하기에는 약한 존재라는 사인이 되었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문에 앉아서 다윗과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노골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끌어오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력을 모으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을 할 때에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군대를 일으키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을 합니다. 이후에 성경에 기록된 이들 반란군의 최종 목적은 다윗을 양위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윗을 죽이고 압살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봉에 다윗이 그렇게 아끼던 아들 압살롬이 서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사랑의 정에 눈이 멀어서 자기 아들 속에 있는 야망과 그 야망이 가리고 있는 엄청난 죄악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심을 하다가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하였지만 도리어 그 사랑을 배신하고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아들을 피해서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위를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었다면 압살롬이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 다윗이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후회하고 고통스럽게 생각한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베풀었던 사랑이 이렇게 그야말로 배신의 칼로 돌아오게 된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압살롬을 비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 그야말로 불구덩이에 기름을 부은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왕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봅니다. 이 사건은 압살롬의 야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윗이 사울 집안의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습니다. 다윗이 직접 칼을 들어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 그의 집안 사람들을 죽인적은 없지만 시므이가 보기에 결곡 사울의 집안을 몰락시키고 다윗이 왕위를 차지한 것이기에 다윗은 사울 집안의 피에 대해 책임이있는 살인자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난을 가는 다윗을 따라가면서 살인자라고 비난하며 너는 피를 흘린 자이기에 그 피 값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냥 한마디 한 것이 아니라 피난길을 가는 다윗을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다. 

시므이의 비난은 비록 그가 사울과 동족이기는 했지만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에 다윗에 대한 반감을 숨기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보기에 정당한 왕은 사울이었고 또 사울의 아들이 이 나라를 계승을 해야 하는데 다윗은 왕위의 찬탈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존경하며 왕으로 받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날은 다윗의 안과 밖의 모든 것이 다 무너진 날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무용으로 전쟁터를 누비던 용감한 장수였지만 이제는 쳐들어오는 대적들과 싸움한번 겨뤄보지 못하고 도망치는 비겁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였지만 그의 아들의 비열한 야망을 보지 못하고 아들의 배신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사랑한 왕이었지만 자신을 향한 백성들의 불신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받쳐주었던 모든 자존감의 근거들이 한시에 다 무너져버리는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비참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은 없었습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보면서 다윗의 부하장수이면서 요압과 같이 다윗의 조카였던 아비새가 가서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다윗을 다윗되게 하는, 우리가 기대했던 가장 다윗스러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다윗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에는 두 가지가 담겨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면 내가 그 저주를 받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이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야 할 것이고 만약 내가 억울하게 저주를 받는 것이라면 오늘 내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가장 다윗이 고통스러웠을 순간에, 다윗의 자존감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앉았을 그 때에 다윗이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 속에서도 살아계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따위가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는 분노가 당연히 그의 마음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다윗의 모습을 이미 지난주에 나발을 향해 분노하는 모습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 내가 당할만하니까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당하며 잠잠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오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에도 자존감을 중요시합니다.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외부의 권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이 모든 판단의 기준입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고 당연히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를 기분나쁘게 하는 모든 것은 악한 것입니다. 뭐 인간의 본능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할수 있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한 개인의 판단과 감정이 중요시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인류의 역사에서 진리와 전통과 권위가 개인의 판단과 감정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문제가 다 자존감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심리학의 전성시대이고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모든 책들은 무엇이 객관적인 진리이냐는 논하기 보다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 너는 네 모습 그대로 옳다는 이야기들의 무한 반복일 뿐입니다. 

사실 요즘 이 세상에 여전히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존감이라는 하나의 종교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어떤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대자까지도 나를 섬겨야 하는 그런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기에 내 귀에 듣기 좋은 말들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나를 기분나쁘게 하는 어떤 공동체도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존감을 중시한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보면 그만큼 이 사회 속에서 각 개인들인 낮은 자존감으로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베풀 여우가 있고 용서할 아량이 있고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자존감을 주제로 쏟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여유, 그런 아량, 그런 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 자존감 외에 더 높은 어떤 가치도 상실해버렸고 그러다보니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뒷받침할 어떤 근거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자존감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순간 그 자존감을 받쳐주는 모든 것을 부인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기준에 따라 내가 늘 옳은 것도 아니고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존중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자신이, 내 자존감이 그 기준을 대체해버리게 되면, 당장은 그래서 내가 늘 옳고 내가 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그 자존감을 지켜줄 수 있는 기준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도 우리 스스로 하는 괜찮다 괜찮다하는 거짓말을 더 이상 믿게 되지 못하고 이렇게 허공에 붕 뜬 자존감은 결국은 더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존귀한 존재입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야 합니까? 내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경청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여러분은 무슨 이유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그 어려운 순간에 다윗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향한 모든 칼끝과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과 자기 자신의 자책감으로부터 다윗을 지켜주었던 것은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누구든지 나를 해치는 사람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늘 옳지 않으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면 나는 낮아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받아 마땅한 대우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억울하다면 하나님이 내 모든 억울함에 대해 갚아주시고 나를 높여주실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그의 인생은 자신의 자존감을 세우고 자기 자신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생이라는 각성이 이 모든 일들을 견디게 하고 회복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내가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굳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어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인 기준 속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고 우리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인정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나를 더욱 귀히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더 여유있고 더 베풀고 더 인정해주고 그러면서 더 견고한 진정한 자존감을 가진 삶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에 우리는 낮아짐으로 우리의 본 모습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높이실 때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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