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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욥기 6:1-7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3월부터 사도신경의 한구절 한구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가장 많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버지, 전능하심, 창조주라는 단 세 단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신에 대한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이기에 사도신경의 표현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닌,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나타나는 표현들이었습니다.

먼저 아버지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서 그들이 믿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까요? 그러면 유일신을 믿는다는 이슬람교는 어떨까요? 예전에 이슬람교를 믿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글의 제목은 “이제 나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감격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네 구절 정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편 89:2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이사야서 63:16, 64:8)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라는 관념을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은 구약성경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 이후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수많은 구절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에는 이보다는 좀 더 어려운 문제들이 들어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전능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계십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모습에 익숙하지만 당시의 다신교 사회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려보자면 신이라고 다 전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들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맡은 영역이 있기에 그 영역에서만 능력이 있는 것이지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의 아버지라는 제우스도 하늘에서 번개나 던질 수 있지 다른 신들의 영역에 마음대로 간섭할 수도 없었고 다른 신들을 마음대로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이 세상이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들도 인간들처럼 서로 다투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이 세상이 불완전한 신들의 각축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 보겠지만 이 세상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이유를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격이 떨어지기 때문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같이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고백하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 한분께 전가가 되는 소위 신정론(神正論)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세상의 고통, 재난, 전쟁, 그리고 인간의 모든 악행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선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전능하시지 않다”가 됩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악한 세상을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은 이 세상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는데 어쩔 수 없이 악한 일이 벌이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다는 결론이 되어버립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 시대에도 결코 당연한 고백이 아닙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을 갖지 못하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신경의 첫 구절부터 우리는 우리의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전능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책이 욥기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논쟁의 주제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신데 네가 어찌 감히 하나님께 불만을 가지는가를 따지며 모든 것이 네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사실은 묻고 싶어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겨워하며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설득하려는 수많은 말들에 지쳐가고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을 변호하는 양 떠들어내는 소리들을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 이유는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화살이 되어 자신을 찌르고 마치 독을 마시는 것같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표현들,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는 내 삶의 질서가 깨어졌고 도무지 내 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답함의 표현하는 것입니다.

욥기 13장에는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욥기 13:2-3)는 욥의 항변이 나옵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잘난 척하며 떠들어대지만 자기도 그 정도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왜 내 인생에 이러한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는지 직접 하나님께 따져묻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욥기 13:7-8)고도 말합니다. 내가 한번 하나님과 따져보고 싶다, 내 앞에서 하나님을 변호하지 마라, 그거 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이다라는 욥의 거친 반발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신앙이 없거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설득하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어떻게든지 변호하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스스로 전능하심을 나타내시지 않는, 우리가 변명을 해드려야 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로봇이 되는 것이고 인간이 자유롭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예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에 죄에 대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이 자유롭게 죄를 저지를 수 있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고 인간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매우 심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각자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개입하지 못하신다면, 결국 “아이구 어떻하나”하는 걱정많은 하늘에 계신 영감님이 될 뿐아닙니까? 저 사람이 또 죄를 짓네, 아이구 어떻하나, 히틀러가 또 나쁜 짓을 하네, 아이구 어떻하나, 이렇게 착하고 걱정만 많으신 무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혹시 해결이 되었다고 해도 다음에 다시 생각하면 또 답을 얻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제 드리는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살펴보며 여러분들이 앞으로 이 문제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해결해 가는데 다소간의 도움이 될 징검다리를 하나 놓는 정도로 족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은 이 세상의 악을 부정하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차라리 기독교가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한 분에대한 믿음을 전하지 않고 과거의 다른 종교들처럼 이 세상이 선한 신과 악한 신의 싸움터라든지, 여러 다양한 신들의 충동적인 갈등의 전장인 것처럼 가르쳤다면 이런 문제들을 빗겨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의 대부분의 결론은 일종의 운명론, 이 세상은 신들의 놀이터이기에 인간은 무능하게 그러한 신들의 장난의 결과로 벌어지는 모든 악한 결과들을 그저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는 것, 이 세상의 어떤 악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와 악은 이 세상의 본질이 아니며 결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성경은 왜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사탄은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설명들을 덧붙이지만 성경에 분명한 근거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악은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명되면 이해되면 정당화되고 자기 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악은 자기의 자리가 없습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제거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양심을 살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 세상의 죄와 악과 대항하며 최후의 승리를 믿고 오늘도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갈 것을 촉구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매우 담대하고 매우 무모하고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현실 속의 악을 어떻게 제어하며 싸워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의심하는 순간 우리들도 불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세상의 악과 대항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세상은 더 악한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만이 이 세상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2000년 동안 이 고백을 이어왔기에 그래도 이 세상에서 악이 이정도로 제어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개인의 삶에서의 은혜의 경험이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광대한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깊이 관여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개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놀랍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때로 냉혹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실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신앙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우리 인생의 수수께끼들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왜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조금씩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속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우리가 지금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내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의미와 섭리가 있으리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아직은 감히 이 세상의 문제를 품고 이해할만한 경륜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광대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대한 깊은 숙고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서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세 번째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의 책임을 지고 선교적인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무능한 방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면 인간이 무능해지고 인간이 자유로워지면 하나님이 무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는 더 성장하고 더 온전해지며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함께 감당하며 이 세상에서 더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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