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6(주일) 주일설교 요약

by ADMIN on Dec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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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 요한1서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1서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누구시며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가르치고 요한서신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자주 사용이 되고 가장 강조되는 한 단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사랑일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성경 66권 중에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요한서신은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은 길지 않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올바른 사랑과 잘못된 사랑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전해 줍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실재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말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지 않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고, 그 사랑 안에서 이제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이미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사랑이라는 말을 통해 요약하자면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며 그 분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래서 그분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하늘의 아버지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 분을 사랑하는 기쁨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고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가 생각하면 별로 그렇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속에 있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잘못된 사랑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매우 간결한 표현이지만 어떤 면에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해 줍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게 되는 장면에서 성경은 그 열매를 처음 본 하와에게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먹음직하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보암직 하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자신을 지혜롭게 할 만하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가리킵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 두 번째 시험은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이것을 얻기 위해서 사탄에게 절하라는 것,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그것을 갖기 위해 사탄에게 절하라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라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유혹을 이기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욕망하고 얻기를 원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탄마저도 섬기는 불의함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내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무언가 눈에 띄는 일을 행하고 내 자신을 치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늘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육신의 욕망이 없으면,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굶어 죽을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도 이성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되어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자존감을 가지고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욕망이 죄가 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필요를 느끼고 채우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욕망이 필요를 넘어서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육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육신적인 존재만은 아닙니다. 모든 욕망에도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내 육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면 그 욕망을 채우면 만족을 얻겠지만 인간에게는 육신이 원하고 내 육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욕망하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없이 내 필요가 채워지고 있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며 내가 무언가 결핍이 된 존재라고 생각하며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됩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 욕망이 내 필요를 넘어서게 되면 그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되어서 우리를 늘 결핍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불만과 불안 속에 빠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 채널이 세가지 밖에 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텔레비전을 켜면 수 많은 채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공영방송, 공중파 방송을 빼면 다 홈쇼핑 채널들입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내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필요하게 되고 남들도 다 산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당장 사고 싶어집니다. 대형마트나 쇼핑몰에 갈 때에는 내가 사려고 하는 것이 몇 개 없었지만 막상 가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대형마트가 더 싸다고 절약하기 위해 갔다가 오히려 불필요한 것 까지 사게 돼서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요가 욕망을 낳는다면 그 욕망을 채우므로 필요가 해결되고 만족을 누리게 되겠지만 욕망이 필요를 낳게 되면 그 필요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게 되고 우리의 삶의 질서가 깨어지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카라마조프의 세 아들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만 그 중에서 막내인 알료샤가 존경하는 인물인 조시마 장로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조시마 장로는 죽기 전에 그의 삶을 회상하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는데 그 마지막 설교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옥이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에 와서 사랑하기를 갈망할지라도 나의 사랑 속에서는 더 이상 공덕이 없을 것이며 희생조차 불가능하구나. 왜냐하면 이미 지상의 삶이 끝났으며 생명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불가능하구나. 왜냐하면 희생적인 사랑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삶이 지나가 버려 그런 삶과 지금의 존재 사이에는 끝없는 수렁만이 존재할 뿐이잖아”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몸은 사랑의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힘겹게 느껴지고 천상에서의 삶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삶을 허락하신 것은, 이 육신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 동안 우리의 몸으로 사랑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에 육신으로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죽음 후에는 오직 영원한 후회와 탄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사랑을 하고 우리의 몸으로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의 배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여 다른 이들을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손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움켜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풀어 주고 다른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보이는 모든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기 보다는 존중과 사랑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아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이 남들이 가는 곳을 뒤처지지 않게 부지런히 쫓아다닐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하는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가 사랑의 말을 듣고 우리의 눈이 다른 이들의 사랑의 시선을 느끼고 나를 위해 베푸는 사랑을 보게 될 때에, 우리의 몸이 사랑의 온기를 느낄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사랑을 경험합니다.

몸은 도구고 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주체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혼이 없는 육신은 그저 생존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어 무엇을 위해 사는 지를 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존재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더 확실하게, 더 강건하게 존재하게 됩니다. 영혼이 없는 육신이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면 맹목적인 욕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치 칼이 의사의 손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휘둘러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으면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잘못된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느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잘못된 사랑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우리의 몸을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대림절과 성탄절의 절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더 집중하고 그 사랑 안에서 또한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베풀고 나눠야 하는 사랑의 몫, 사랑의 사명을 더 깊이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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