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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태복음 11:25-30

제목 : 예수님의 초대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고치시는 사역”(4:23; 9:35)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역은 한편으로는 말씀으로 하신 사역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하신 사역이라는 점에도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5-7장의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하신 사역을 모아서 소개하고, 8-9장에서는 10가지 기적 모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동으로 하신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제 11장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바로 앞선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면서 하신 설교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마태는 1-10장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1-2), 사역 준비 기간(3-4, 세례 요한의 선포, 시험 받으신 이야기), 구체적인 사역 내용 (5-9), 제자 파송(10) 이야기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차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1장에서는 그렇게 전개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중간 결산 내용을 전해줍니다.

 

<11장의 첫 번째 단락: 세례자 요한과 이 세대가 보인 반응>

 

1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절은 10장 설교의 마무리 부분)

1) 2-19,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계기로 한 중간 결산 (복음에 대한 거부)

2) 20-24,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

3) 25-30, 예수님의 감사 찬양과 초대

 

먼저 세례 요한의 질문(11:2-6)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11:7-19)을 통해 중간 결산을 내리는 첫 번째 부분에서 예수님 사역에 대한 이 세대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2-3절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당신이 오실 그분,” 곧 메시아이신지 여쭈어 보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5)

 

이 대답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하는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35:5-6; 42:7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이 소개되어 있는데, 8-9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소개된 일이 메시아가 하실 것으로 기대된 바로 그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35:5-6)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42: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에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하도록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 내용을 보면서 아직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기대했던 일과 예수님이 하신 일의 성격이 매우 달라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 외치며 진노의 심판에 대해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오셔서 그런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실 줄 알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반대의 일, 곧 은혜를 선포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예상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서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태는 세례자 요한이 제기한 질문을 계기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매우 분명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16-19절을 보면, 이 세대는 하나님 나라 선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16-17절에서는 아이들의 놀이에 빗대어 이 세대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17절에서 피리를 분다는 표현은 아이들의 결혼식 놀이를 빗댄 것이고, “슬피 운다.”는 표현은 장례식 놀이를 빗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 아이들이 거기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잡수시며 천국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셨으나, 이 세대의 사람들이 거절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슬피 운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사역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회개를 요청했으나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8절에 의하면, 이 세대 사람들은 요한에 대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며 거절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19절에 의하면, 이 세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금욕을 동반한 회개의 촉구에도, 예수님의 천국 잔치를 통한 초대에도 이 세대의 사람들은 거부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11:16-19절을 통해 마태가 전한 예수님 사역에 대한 중간 결산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마태는 중간 결산 보고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9:3절에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 서기관들이 보인 반응이 적혀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9:11에는,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잡수시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이 적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하며 묻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9:34에는,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이 적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암시된 대로, 그리고 마11:16-19에서 요약된 중간 결산의 내용처럼, 지금까지 수행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나타난 결과에 있어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 생각해 볼 점: 예수님의 사역이 가시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반대에 직면했다면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10:24-25)“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

 

예수님 사역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1장의 두 번째 큰 단락인 11:20-24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거부는 집단적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도시들을 통틀어 그 도시들에 대해 책망하며 심판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라신 여기에만 언급됨.

벳새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동네 (1:44; 12:21)

제자들의 선교 파송 보고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셨던

, 그런데 무리가 따라왔고, 거기서 하나님 나라 일을 이야기하시고 병

도 고쳐 주신 곳 (9:10-11),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곳(9:12-17)

맹인을 고쳐주신 곳 (8:22)

가버나움 - 나사렛을 떠나 거주지로 정하신 곳 (4:13),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곳 (8:5), 예수님의 본 동네로 언급됨(9:1),

성전세 납부 관련 이야기의 배경 도시 (17:24).

두로/시돈 예수님의 사역지 (15:21)

 

오늘 본문 마11:20-24절에 의하면, 이 세 도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장소로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도시들은 한 묶음으로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21절에 나와 있는 대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의 표현에 해당하합니다(9:3, 3:6, 4:3). 그런데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는 기적들을 보고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1:21-22절에서 이런 고라신과 벳새다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차라리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이 심판 날에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은 구약의 예언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언서에서 예언자들은 우선 유대의 잘못에 대해 책망하며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고는 나중에 회복될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게도 그러한 예언의 중간에 주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13-23장에서, 예레미야는 46-51장에서, 에스겔은 25-32장에서 바벨론, 애굽, 앗수르, 모압, 암몬, 블레셋, 구스 등 여러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 이방 나라 가운데는 두로와 시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를 사23:1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3:1)

 

사실 이사야 23장 전체와 에스겔 26-28장은 특히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예언이 적혀 있는 곳입니다.

11:23-24절에서는 가버나움도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책망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구약에서 죄로 타락하여 멸망한 대표적인 도시로 언급되곤 하는 소돔 땅과 비교하며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타락했던 소돔도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더라면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세 도시가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3a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14:13-15절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바벨론 왕의 교만을 두고 한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하나님이 유대를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한데, 그것도 모르고 마치 자신이 최고가 된 양 우쭐대다가 재난에 처하게 될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 예언 부분을 보시면, 대부분 그 도시들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는 교만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만이 오늘 본문의 세 도시에서도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만은 매우 위험합니다. 16:18에서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20-23)에 그 좋은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헤롯왕은 두로와 시돈 백성들이 자기의 연설을 듣고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했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벌레에게 먹혀 죽은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교만이 패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내 눈으로 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만이 우리의 눈을 가려 버리면, 그 기적적인 치유와 축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그런 교만 때문에 기적은 보았지만, 그 기적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 도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과 심판 선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 생각해 볼 점:

1) 진정한 회개는 기적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는 데서 온다.

 

2) 옛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역사, 곧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도시들에게 내렸던 경고의 음성이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도시들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지금 유대인들도 옛날 이방 민족이 처했던 심판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특권과 현 상태에 안주하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3) 은혜가 클수록 따르는 책임도 크다.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기도> (11:25-26)

 

11:25절에는 놀라운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 함은 당시에 자신들이 율법에 정통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반대로 어린 아이들은 세상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총칭하는 듯합니다. 힘없고 연약하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게 하셨는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볼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에 대한 반응이 거절과 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기도를 올려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올려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주변 상황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평안을 누리셨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생각해 볼 점:

 

1) 자기중심적인 교만은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2)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사역이 반대에 부딪쳤지만, 그 반대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며 평안을 누리시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신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 (11:27)

 

11:27절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 계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전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생각해 볼 점: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참고. 임마누엘, 1:23; 28:20)

 

<예수님의 초대> (11:28-30)

 

오늘 본문의 마지막 세 구절은 누구나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입니다. 쉼과 안식을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힘든 현실과 마주하며 날마다 많은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초대는 정말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의 1차적인 뜻은 당시의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말하는 멍에는 모세의 율법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록된 율법 외에도, 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부가적인 구전 조항들을 추가함으로 이 율법 준수를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전 율법들은 하나님의 본뜻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법 위에 두고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고 있었습니다.(참고. 15:7-9).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런 율법 해석에 따라, 본질은 가려지고 형식만 남은 율법의 멍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이 해석해 주신 율법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매우 명쾌하고 본질을 꿰뚫는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 해석과 실천의 사례가 이어지는 마12:1-14절에서 소개됩니다. 내용은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온갖 장치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자구에 매여 율법의 본뜻은 놓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꺾어서 먹은 제자들이나,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 규정의 위반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긴급한 필요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마 22:34-40에 요약된 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이런 본질에 충실하며 논란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취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본질만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랑의 정신으로 모든 일을 대하면 답은 굉장히 분명해 질 것입니다. 문제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을 끌어들여 논쟁하고 헷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본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 정신을 잘 배우고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매우 분명해 질 것입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천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지 않을 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저자도 7:13-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그것은 멍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 그것은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 생각해 볼 점

1) 사람들의 거절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초대는 계속된다.

2) 먼저 주님께 나아가고, 그런 다음에 주님의 멍에를 배우라 합니다.

 

<합심기도>

1) 반대와 저항이 있더라도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잘 따를 수 있기 바랍니다.

 

2) 부정적인 주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초대에 바르게 응답하여 주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 주님 약속하신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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