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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의 최후 / 열왕기하 9:30-37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판타지영화, 혹은 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대중적인 헐리우드의 대작들과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많은 전래 동화들, 전설들의 가장 일반적인 구조는 권선징악입니다. 흥부는 착하고 놀부는 악합니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와 콩쥐는 착하고 팥쥐와 새언니들과 새엄마들은 악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악당의 등장, 착한 주인공의 고난, 착한 사람들의 승리, 악당의 최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문학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현실주의적인 문학 혹은 영화 속에서는 대부분 절대적인 악, 절대적인 선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때 현실주의라는 말은 도덕적, 이상적, 윤리적, 신앙적이라는 말과 대치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경험도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궁극적으로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눠진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타락과 구원과 심판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양분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상당히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앙의 영웅으로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의 생애에 남아있는 오점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고 모두가 허물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누구든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악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세벨입니다. 구약시대에 대표적인 악한 왕이 아합이라면 아합의 왕비였던 이세벨은 사실상 아합의 뒤에서 그 시대의 어두움을 주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 처음 소개가 됩니다. 그 당시에는 시돈도 인근 지역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북이스라엘도 이전에 계속되던 정치적인 불안정에서 벗어나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아합은 시돈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고 그 증표로 두 왕국간의 혼인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시돈왕의 딸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주위의 가나안 민족들은 바알과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이라고 알려진 여신을 섬겼는데 특히 시돈 지역은 바알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방 여인인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이세벨을 통해 시돈의 바알 신앙이 이스라엘에 퍼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은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는데 기근을 피해 모압 땅에 찾아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고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왔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혼탁한 상황 속에 있었기에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와서 어떤 영적인 감화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한 것은 바알 신앙이 이스라엘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왕기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세벨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위에 세워진 나라인데 이세벨의 시대로부터 바알 숭배가 만연하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게 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이세벨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세벨은 자신이 원해서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이세벨로서는 자신을 이스라엘로 보낸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시돈과 이스라엘에 혼인관계를 맺은 이유는 두 나라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시돈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스라엘에 있는 바알을 믿는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세벨 자신은 어떤 악을 적극적으로 행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신념을 가지고 수행한 사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세벨이 보기에 오히려 문제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두 나라의 화합을 해치고 바알을 섬기는 선량한 사람들을 핍박하는 악의 축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합은 왕궁에 가까이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갖고자 했지만 나봇의 거절 때문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땅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각 지파에 속한 집안들에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나봇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거래라기 보다는 나봇의 신앙 고백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아합은 이일로 속이 상해서 밥도 먹지 않았는데 이를 보고 이세벨이 왕이 그까짓것을 가지고 걱정을 하냐고 하면서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사서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증언하게 하여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 아합이 가지게 했습니다.

이세벨이 나봇을 죽게 한 것은 자신이 나봇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 아합을 위한 일이고 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세벨이 보기에 고집스러운 종교적인 원칙주의자들 때문에 왕이 자신의 권세에 제약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고 왕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국가를 통합하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완고한 신앙인들의 손에서 나라를 건지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이 악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사건이 적어도 두 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을 때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죽었을 때에도 그들의 배후에 있던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 때문에 선량한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엘리야는 큰 영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세벨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름의 소신, 신념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니다.

아합은 두려워하고 우유부단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악을 저지른 사람이었다면 이세벨은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 어쩌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생각을 성경을 통해 유추해 보면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문화란 다원적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시돈의 문화가 이스라엘에 더 확산되고 바알의 신자들은 격려를 받아야 하고 종교간의 평화를 깨드리는 완고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고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왕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세벨의 신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두 번째 장면은 바로 이세벨의 최후입니다. 아합이 전쟁터에서 죽은 후에도 그의 두 아들이 연이어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아합의 집안에 반역을 일으키게 하시며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셨습니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인 요람왕을 죽이고 왕의 어머니인 이세벨이 있던 왕궁으로 들어올 때에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세벨은 이 모든 일들을 알면서도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신대로 살다가 우아하고 의연하게 악한 자들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자신을 향해 오는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말합니다. 시므리는 과거에 이스라엘의 엘라 왕 때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오므리라는 장군이 세력을 규합해서 시므리를 공격하였고 시므리는 왕이 된지 7일 만에 왕궁이 함락되자 불을 지르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므리가 시므리를 대신해서 왕이 됩니다. 이 오므리가 바로 아합의 아버지였습니다.

오므리의 왕조의 정통성은 왕을 살해한 시므리를 제압하고 평화를 가져온 것에서 찾았을 것이기에 오므리 왕가의 사람들에게 시므리란 반역자, 배신자,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악한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른 것은 “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네 반란에는 아무런 정당성이 없고 네 반란은 실패할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 앞에 찾아온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불의한 반역의 희생자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왕궁에서도 누구도 그 생각에 동조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후가 이세벨을 올려다보며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고 외쳤을 때에 이세벨 곁에 있던 내시들이 이세벨을 창 밖으로 던져서 이세벨이 죽게 됩니다. 이세벨 곁에 있던 내시들도 이세벨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고 에후의 편에섰던 것입니다.

이세벨이 마지막 순간에도 화장을 하고 있었고 예후 앞에서도 당당햇던 이유는 자신은 결코 죄를 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세벨의 죽음이 아합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야기하고 이세벨이 행한 일들을 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소신대로 산다는 말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을 저지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은 다 자신이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악은 보지 못하고 끝까지 다른 이들을 향한 분노만을 간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자신의 소신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심판받아 마땅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인생 수고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잘못된 만남으로 잘못된 영향력을 받아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헛된 열심으로 평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야 내가 잘못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살아온 평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딱히 악한 일을 저지른 것이 없고 내가 늘 억울하고 힘들고 내가 다 참았고 내가 다 손해봤다고 자기 혼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보이고, 나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훼방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어그러졌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날로 복잡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저것은 나쁘다, 잘못되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지고 모든 것이 혼탁하게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내가 선과 악의 문제를 덮어버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중 알았던 사람에게도 부정한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갈라집니다. 그 사람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잘못이 있다해도 본래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착한척 하고 살았지만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을 보니 그 사람도 별수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악을 뒤섞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가 선하게 살았던 것은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선한 삶의 힘으로 자신 안에 있는 악하고 부정한 것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하게 사는 사람에게 선한 모습이 있다면, 그렇다고 그 사람의 악행을 덮어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별수 없이 악한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그가 가진 선한 모습으로 그자신의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수용소군도”에서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우리와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과 악이 혼재한다는 것이 악한 일을 관용하고 덮어두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꼭 나는 선하고 그들은 악하다라는 통념 속에서 악을 규정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러면서부터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악이 있고 그들 속에도 악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선한 모습이 있고 내게도 선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 안에 있는 악과 싸우며 옳고 그름의 기준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세벨의 최후가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자기 소신이 있고 자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삶일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도 이세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 있는 선이 내 안에 있는 악과 싸워 이길수 있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 자신을 살피며 우리 안에 있는 이세벨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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