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교회 :::
현대교회 로고
신앙으로의 초대 현대교회 이야기 예배와 모임 나눔과 섬김 참여와 헌신
예배안내 양육과정 안내 매일묵상 교회학교 목장안내


서브메뉴 안내 - 섬기는 이들


댓글 0
하나님이 보이셨느니라 / 로마서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 내용이 가장 많고 체계적이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전모가 이 서신 안에 담겨있는 중요한 서신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책은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일종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가르침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로마서는 해석과 설명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지, 그리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복음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를 통해 복음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에는 바울이 가기 전에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3차에 걸친 지중해 동부 지역의 선교여행을 마칠 즈음에 다음 사역을 구상하면서 바울은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지중해 서부 지역에서 선교를 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일종의 선교사역 지원을 얻기 위한 자기 소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인생 여정이나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스펙을 기록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믿으며 어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로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기원이 되는 중심지였고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로마 시민권은 그야발로 로마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었다가 점차 확산이 되어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에 정복된 다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선별적으로 그 지역에서 재력이나 영향력이 많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수여하여 로마제국에 충성을 하게 하고 그들을 통해 각 지역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로마로보면 변방의 소수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이었지만 상당히 유력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쓸 때에는 아직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라는 도시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도시였을 것입니다.

선교적인 측면에서도 바울은 한 지역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당히 전략적인 선교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로마제국의 복음화를 위해 로마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가고자 해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서의 서론에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이 여러 번 막혔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쓸 때에 바울은 그리스 지역에 있었는데 배타고 가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지만 당시에 예루살렘의 기근으로 그곳에 구호성금을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바울에게 로마라는 도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갈 수 없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로마에는 바울이 가기 전에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선교를 중심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울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도시에 바울이 없이도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위대한 선교사였던 바울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로마라는 도시는 여러 면에서 바울에서 선망의 도시였지만 로마서를 보면 바울은 주저함없이 매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위대한 도시를 건설한 그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들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주축을 이룬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고자 노력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왕기에서 본 것처럼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증명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도들의 설교는 다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가 그렇고 유대인들에게 대한 바울의 설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접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약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율법서나 예언서를 먼저 인용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좀더 이성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자연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본론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사랑과 위로와 평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합니다. 서점에 나가보면 베스트셀러는 온통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 내 마음대로 해, 너는 잘하고 있어라는 책들로 가득합니다. 저자만 바뀌고 표지만 바뀌어서 똑같은 이야기가 무한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제법 괜찮게 살고 있고 뭐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한쪽 편에서는 선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편에서는 소극적으로 말해서는 어리석은 일이고 적극적으로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고 평가를 받는 일들이 비일이재합니다. 좋고 덜 좋은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면 아예 한 쪽에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나쁜일이 되어버립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해 평가할 때에도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들을 보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에 우리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들, 우리가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이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럽히고 망치는 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인간들의 행위가 불의하기때문에 진노하시고 인간들을 심판하신다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우리는 몰랐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지도 몰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어느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작고하신지 오래된 우리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저명한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순수한 서정시로 명망이 높았지만 일제시대 말기에 노골적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분의 생전에 한 신문에서 인터뷰를 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에서 기자가 왜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쓰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대답은 "나는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습니다.”였습니다.

정말로 몰랐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국의 지배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시를 쓰면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런 악의 제국이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하지 못했을까요? 아무런 이익을 받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순수시를 쓰던 사람이 일제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찬양하는 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변명하면서 하는 일들이 정말로 정당한 것일까요? 혹시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있으면서도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묻어두고 그런 행동들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분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절)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The most incomprehensible thing about the world is that it is at all comprehensible.)”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연히 생겨났다는 이 우주가 지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것이고 우주의 한편 구석에 있는 먼지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두뇌가 광활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법칙을 찾아내고 우주의 운행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이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질서가 있고 우리가 그 질서 안에 있으며 이 질서를 통해 온 우주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과학자들은 우리가 이 광활한 우주 속에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그렇다면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우길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는 권리를 이 우주를 지으신 분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중에는 바로 우리들 인간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들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담겨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생물학자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라고 말하고 인간은 오직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이 가장 존경하는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가장 탁월하게 효과적으로 퍼뜨리고 가장 이기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이타적인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 바보같은 이타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을 합니다. 왜그럴까요? 왜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들 중에 그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왜 우리는 또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본받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내 마음을 늘 새로움과 경외심과 놀라움으로 채우고 내 생각을 계속해서 사로잡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에서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며, 내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내용들을 잘 요약해 줍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를 생각해 볼 때에, 그리고 인간이 단지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양심을 가지고 있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이 우주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이 우주의 질서를 깨달았으면서도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오늘날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인간들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근대이후의 과학적인 성취에 도취되어서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성취라는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법칙, 질서를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우주에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낸 법칙이나 조금이라도 수정한 법칙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거장들의 그림이 가득한 미술관에 가서 그 그림들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감동하면서 내가 이렇게 이 그림들을 이해하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위대합니까? 그 그림을 그려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감상하며 놀라워하는 사람들입니까? 누가 위대합니까?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우리들 자신입니까?

저는 제 인생을 스스로 돌아볼 때 너무나 모순적인 두 가지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목회자이고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실상은 매우 이기적이며 어리석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존재입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고 그저 내 인생 하나만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을 때에 나를 통해서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볼 때에 여러분들이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 예측하지 못했던 기회들을 통해 선한 열매들을 맺게 되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작년에 캄보디아 선교를 갔을 때에도 하나님이 큰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 세상을 통해, 자연 만물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 은혜의 손길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주일 설교 영상   ADMIN 2020.04.19 63
공지 매일묵상 안내   ADMIN 2017.03.11 245
92 2018.10.7(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10.07 29
91 2018.9.30(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9.30 26
90 2018.9.23(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9.23 44
89 2018.9.16(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9.23 29
88 2018.9.9(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9.09 42
» 2018.9.2(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9.02 42
86 2018.8.26(주일) 주일설교요약   ADMIN 2018.08.27 36
85 2018.8.19(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8.20 32
84 2018.8.12(주일) 주일 설교 요약   ADMIN 2018.08.12 55
83 2018.8.5(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8.06 32
82 2018.7.29(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7.29 37
81 2018.7.22(주일) 주일설교 요약   ADMIN 2018.07.22 28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Next ›
/ 16
Designed by hikaru100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

SketchBook5,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