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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 / 사무엘상 1:9-18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기드온은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사사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왕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그의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보다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했고 사사시대는 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영적으로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정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의 전환의 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무엘상이 한 여인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닌, 어느 평범한 한 여인이 자신의 슬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므로 한 시대의 영적인 어두움이 벗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은혜의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한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나는 스스로를 마음이 슬픈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슬펐을까요?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이야기를 보면 그녀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에게는 아이를 낳아준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수치가 되고 모멸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위로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한나를 사랑하는데 무엇을 걱정하냐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세상에 열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 한 딸 보다도 나은 남편이 존재하기는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자녀를 얻지 못한 슬픔을 공유하며 서로 위로하고 함께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구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한나의 남편은 결코 한나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나를 통해서는 사랑을 얻고 또 브닌나라는 또 다른 여성을 통해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두 여인 모두에게 부당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가 깨어진 왜곡된 시대가 만들어낸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남편은 가해자였고 한나에게 베푸는 위로는 근본적으로는 위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 속에 여러 아내는 두는 경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성경적인 가정은 일부다처제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시대에는 괜찮고 신약시대에는 안된다고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만을, 하와에게 아담만을 배우자로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보면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후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여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데도 아담을 위해서는 하와 한 명만을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여서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배우자를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첩이 있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회개의 증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한나의 슬픔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슬픔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 여인의 존재를 오직 자녀의 잉태를 통해 증명해야 하는 불의한 세상이 강요한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그러한 부당한 세계를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세계의 가치관을 실현하지도 못하는 연약한 인생의 한계가 빚어내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슬픔은 그녀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성소를 찾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 모습이 당시의 제사장으로서 성소를 관리하고 있던 엘리의 눈에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술취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한나가 절박하고 간절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마치 겉으로 보기에는 술취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며 기도했다는 것은 그의 원통함 속에서 속에 깊은 슬픔을 터뜨려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은 진정한 내 자신이 되는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감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우리가 성전을 향하는 이유는 내 감정을 억누르고 거룩한 척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감정을 회복하고 슬픔을 드러내어 근원에서부터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온다고 성전에서 기도한다고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는 그의 주위에 엘리 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슬픔의 이유들이 있습니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던 아픔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고 삶의 애착이 극심한 고통이 되어 돌아오는 경험을 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하고 내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부정당하는 현실을 마주 대하기도 합니다. 내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개인의 무능과 그로 인한 상처들 속에서 괴로워하고 우리 집안에 쌓여있는 갈등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 사회 속에서 경험하는 불의와 부조리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한 불안들이 우리에게 또 다른 슬픔의 이유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회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냥 참고, 그냥 견디고, 그냥 덮어버리고,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살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결국 우리는 답답하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까닭없이 분노하게 되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슬픔을 표현하고, 연약한 자기 자신을 위한 위로를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로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슬픔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슬픔은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거룩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 아닙니다. 내가 갇혀있는 이 사회의 불의함 때문에, 이 시대의 잘못된 가치관과 편견 때문에, 이 세상의 무정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슬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슬픔은 부당한 가치관 속에 있는 이 세상에 대한 고발이 되고 이 세상이 구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깨달음이 되고 이 세상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요청하는 믿음의 결단의 첫걸음이 됩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한나의 슬픔은 사무엘의 탄생을 가져옵니다. 사무엘은 그녀의 인생에 대한 위로였을 뿐 아니라 불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슬픔은 우리의 삶을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삶과 더 깊이 연결시킵니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삶에 연민과 공감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와 아픔, 슬픔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슬픔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신뢰를 보여주는 가장 깊이 우러나는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의 슬픔은 다른 이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됩니다. 이를 통해서 위로받아야 했던 사람이 진정한 위로자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슬픔 속에 있던 한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가 사무엘상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하는 사사기의 후반부부터 더욱 깊어지는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나의 슬픔은 그 시대의 슬픔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한나의 슬픔을 거둬주시기 위해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그 사무엘은 바로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움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설교를 마치기 전에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오늘 본문에는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통곡하며 기도했는데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인데 통곡하며 기도한다면 소리가 크게 나야 할텐데 소리는 나지 않고, 그러면 조용해 기도했다는 것인데 마치 엘리 제사장이 보기에는 술취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독특한 것이 이 엘리 제사장이라는 사람인데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입을 주목해서 보았는데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결국 엘리제사장은 이 사람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을 하고는 기도에 개입해서 기도를 방해합니다. 

제사장으로서 엘리는 자신이 이 성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도에 대해 판단하고 지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겉모습 뿐이었습니다. 지금 한나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금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고 계신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사무엘상을 읽어가다 보면 당시에 엘리는 제사장이면서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의 역할을 맡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영적으로는 매우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시대에는 매우 드물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엘리는 남의 기도에 상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는 형편 속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다른 면에서는 모르겠는데 기도에 대해서는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다른 교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도 있고 확신이 없기도 하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기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저렇게 기도해서는 안된다 하는 확신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는 개인의 체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은혜받은 경험이 있는 경우에 그것이 일종의 주관적인 확신이 되어서 그 확신을 바탕으로 주장도 하고 또 판단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기도에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지만 대별해서 보면 묵상기도와 통성기도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고 소리를 내어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방법들입니다. 각각의 기도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다른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때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은 주위에서 누가 큰 소리로 기도하면 방해를 받고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신대원에 들어갔을 때에 한 학기는 의무적으로 기숙사생활을 하며 경건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매일 학교의 예배당에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야 했는데 설교가 끝나고 기도시간이 되면 정말로 좋은 뜻에서 가관이었습니다. 신학교는 전국에서 그래도 예수 잘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시간이 되면 정말로 기도의 도사들이 모여서 기도의 경연을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기억이 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오직 “오 주여”라고만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때 같이 새벽기도를 했던 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별명이 오주여 전도사님이 되었습니다. 맨날 기도하면 오주여 오주여 오주여 하고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경건훈련 중에 조를 짜서 순번을 따라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기도훈련이 있었는데 그때는 침묵기도, 좀 더 전문적으로 관상기도라는 말을 하는데 혹시 들어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관상(觀想)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슨 점을 치고 관상을 보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는 contemplation을 번역한 말인데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기도원에서 훈련받는 동안에는 침묵을 하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조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느 조에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게 될 때에 어느 신학생이 기도원에 왔는데 그렇게 침묵을 하는 것이 너무 답답해서 밤에 몰래 산에 올라가서 통성으로 기도했는데 너무 조용한 동네라 그 소리가 다 울려서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주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누가 새벽에 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니까 주위의 분들이, 하나님 빨리 저 사람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가 좀 조용히 기도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통성기도에 익숙해져 있는 분들은 소리를 내서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집중이 되지 않고 자꾸 딴 생각이 나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통성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방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확신도 사실 내 주관적인 체험에 기인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에 있어서도 우리는 다 주일학교에서부터 “두 손 모으고, 눈 감고” 기도를 하지만 성경의 묘사를 보면 대부분 유대인들은 일어서서 손을 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난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성경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통성기도는 통성기도대로, 침묵기도는 침묵기도대로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는 말씀을 암송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다들 조용하다고 우리 교회를 두고 다른 곳으로 기도하러 가서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평소에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라도 내 속에 있는 답답한 것들을 다 토로하며 기도하며 나의 간절함을 내 몸으로, 내 목소리로 표현하는 자유함과 은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통성기도의 장점은 대부분 그런 어떤 감정적 정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으시면 듣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가 은밀하게 조용히 기도하는 그 기도를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보면 또 기도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빠른 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하면 어떤 분명한 주제가 있을 때에는 괜찮지만 복잡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깊이 침잠하여 생각하며 기도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며 구체적인 상황들을 하나님께 아뢸 때에 또한 그 속에도 나의 답답함과 간절함과 진실함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하게 되는 때는 정말로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듯이 내 입술을 열어서 마치 정말로 내 육신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 새벽에 조용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모이시지만 가끔씩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인이든 아니든 누군가 하나님을 만나러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또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동네 교회 목사님들과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새벽기도에 찾아 오시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먼저 현대교회를 갔다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답답하고 기도가 안되서 다른 교회를 찾다가 왔다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스타일이 있고 분위기가 있고 각자 맞는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기도가 잘 된다는 교회가 되는 것, 기도하려면 저 교회로 가라는 말을 듣는 그런 교회가 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벽에 설교 후에 기도하시는 시간에 음악을 틀어놓아서 혹시 소리 내어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셔도 가능한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하고 소리를 크게 내시는 분이 계시면 볼륨을 더 크게 높이곤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관상기도, 묵상기도, 침묵기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다 좋고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평소에는 조용히 기도하는 편이지만 정말로 문제가 있고 답답할 때에는 통성기도를 합니다. 새벽에도 성도님들이 다 돌아가시면 그때부터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도 하고 평일에 다른 분들이 안 계신 시간에 찾아와서 혼자 통성기도, 방언기도를 하곤 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수요예배에는 통성기도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으로, 새벽기도에는 침묵시도를 연습하는 시간으로 삼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훈련을 하고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더 배워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기도의 습관들이 있으시겠지만 그러나 저는 한 번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충만한 은혜를 늘 누리고 계십니까?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확신속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나의 기도생활, 기도의 습관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더 깊은 기도, 더 간절한 기도, 더 새로운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 한계가 있는 것이고 우리의 확신이란 주관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엘리와 같이 기도의 판단자가 되기 보다는 한나와 같이 나의 전심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응답하심을 경험하는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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