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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하는 왕 다윗의 기도 / 시편 51:1-7

오늘 본문은 다윗의 참회시라고 알려진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표제가 붙어있는데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이 이 기도문의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권력이 있는 곳에서 현재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죄를 드러내고 지적을 한다고 해서 그 지도자가 받아들이고 참회하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더 드문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다윗의 이야기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다윗이 밧세바와 부정한 일을 저지른 후에 회개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다윗과 같이 위대한 왕은 그의 업적만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여러분들 우리의 역사에서 광개토대왕의 죄, 혹은 세종대왕의 죄와 같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가장 유대한 왕이라고 불리는 다윗의 죄와 참회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이 다른 나라의 역사기록과는 분명하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 한 왕의 참회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극히 드문 사건입니다. 먼저 왕이 한 나라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결정권자이기 때문에 일단 왕이 결정한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고 신하들과 백성들은 왕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왕권신수설이라는 주장에서 보듯이 종교도 이러한 왕의 권위를 비판하고 견제하기보다는 뒷받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둘째로 왕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항상 옳을 수도 없고 왕에게도 개인적인 삶이 있으며 그래서 옳지 않은 부정한 일들을 은밀하게 저지를 수가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굳이 들어내는 것은 한 나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고 우리말대로 하면 덕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지적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왕의 권세 앞에서 감히 진실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한 가문을 망하게까지 할 수 있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의 멘탈리티 자체가 자신의 오류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고 자신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특별한 선택을 받았거나 특별한 사명이 있거나 자신이 특별한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성찰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왕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뒤로 물러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권력의 기반이 약하고 반대세력의 정치적인 압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자신의 권력의 절정기에 어떤 정치적인 세력의 압박이 없이 오직 그 문제의 비도덕성, 비윤리성, 비신앙성만을 이유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참회한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는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여름에 다윗의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모습들을 살펴 보았고 다윗에게도 많은 허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다윗의 업적 때문에, 즉 다윗이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거나 경제적으로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다윗의 곁에 있는 사람들,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윗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칼을 들고 갈 때에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찾아와 설득하는 이야기를 듣고 칼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죄악으로 기록된 밧세바와의 간음사건과 관련해서도 다윗은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까지 죽게 하는 큰 죄악을 저질렀지만 적어도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자신의 눈 앞에서 지적하며 자신을 비난하는 나단 선지자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왕에게 경고를 하다가 목숨을 잃고 큰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윗의 시대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지난 여름에 보았던 것처럼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서 피난갈 때에 자신을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고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시므이의 비난까지도 그대로 참고 받으며 시므이를 죽이려는 부하들을 막았습니다. 

다윗 왕정에 대한 기록인 사무엘하와 역대상에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교만함에서 인구조사를 명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지만 또한 다윗의 곁에서 다윗의 명을 받아 이 일을 수행해야 했던 그 교활한 요압까지도 이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대놓고 다윗에게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인구조사를 수행하기는 했지만 요압은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 레위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빼고 보고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다윗의 참회가 어쩌다가 있었던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윗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경청할 줄 알고 참회할 줄 아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혹시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머리에 떠오르고 오늘 설교가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지닌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것도 병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실 수는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늘 먼저 적용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물론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우리가 중심이 된 세계를 구성해 놓고 그 속에서 스스로 왕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늘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인이 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늘 옳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됐으며 우리들의 잘못은 있을 수 있는 실수이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말도 안되는 일들을 저지른 것이며 우리들은 억울한 피해자이며 다른 사람들은 가해자들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핑계만을 늘어놓은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지만 언제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내가 정말로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정성을 다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도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일종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대해 포기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잘 알아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참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이 가서 야단을 치고 잘못했다고 서로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기 싫은 티를 잔뜩 내면서 그래도 그 말을 안하면 놀러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밥을 안주거나 계속 야단을 맞아하거나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미안해”라는 말을 모기소리만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상황을 종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어려서부터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집니다. “미안해요”라는 말 한마디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는 기회라는 것이 과연 평생에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입문,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은 언제나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개신교 신앙은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사회적인 개혁운동처럼 생각하지만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루터의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의 첫 번째 조항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참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저는 “미안합니다”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기독교신앙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입에 발린 말, 사교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고 진심으로 다른 이들의 도움과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내가 그 정도 대우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자신의 자아를 일으켜 세워서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내 마음과 온 세상의 중심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나는 겸손하게 내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해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답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래서 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들을 찾아대고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올 봄에 사도신경 강해를 하면서 잠시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를 되짚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대부흥운동은 전형적인 회개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에 진정한 참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데 어떻게 참회를 하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회개하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의 기쁨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교회 속에 그런 체험이 있는가? 그런 기쁨이 있는가? 그런 은혜가 있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제가 진단해보기로 우리나라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에 능합니다. 지성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개혁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성찰하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눈의 티는 보는데 자신들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상은 율법주의자들이고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복음에 담긴 은혜와 능력을 모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은혜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반대로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덕스럽게,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드러내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은혜롭지 못한 것이고 가리고 덮고 넘어가는 것이 은혜롭고 지혜롭고 공동체와 교회에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다 연약하고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인데 뭐 그렇게 원리 원칙을 주장하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진리가 없습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가리고 은폐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은혜만을 이야기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통렬한 깨달음과 고백입니다. 

결국 신앙적으로 볼 때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를 깨닫고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죄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지적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지적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그러면 가리면 없어집니까? 죄를 가려도 죄는 그 가려진 어두운 구석에서 더 큰 힘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덮치고 잡아 끌어갑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를 드러내고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모든 회개는 용서와 회복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못을 알게 되었어도 그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회개가 용서의 전제일까요? 아니면 용서가 회개의 전제일까요? 물론 회개해야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용서해준다는 확신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알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내 인생은 끝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더럽힌 이 죄를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없기에 회개하고 이 죄에 물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씻고 용서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죄하는 공동체는 많지만 인정하고 회개할 때에 받아주고 용서하며 새 출발할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문제를 고백할 수가 없고 그래서 그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곳에 찾아오는 것은 용서와 회복이 아니라 정죄와 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죄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정죄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바꾸고 진정으로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우리가 아는 유일한 힘은 회개와 용서와 사랑입니다. 

모든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답고 진실되며 모든 기도의 문을 열어주는 기도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문이 막혔다고 생각될 때에, 기도가 잘 되지 않을 때에, 뭔가 답답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어려울 때에, 기도가 형식이 되고 간절함이 담기지 않을 때에, 그곳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을 망각하고 있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지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소망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도 없고 우리의 인생의 갈 길를 분별할 수도 없고 죄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도 없고 우리가 목적한 어느것 하나 성취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 참회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 그래서 여전히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내가 왕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아니 이 온 우주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요구를 기도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죄인이며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고 있으며 내 인생을 지금 망치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내 자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이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외에는 우리의 죄를 씻을 길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소망이 없으며 성령의 도우심 외에는 이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참회하는 왕이었습니다. 참회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받은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되며 또한 그 자신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우리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참회하며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진심을 담아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말하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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