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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며 무서워하더라 / 마가복음 16:1-8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동안 부활절 예배만큼은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서 경축하며 드릴 수 있기를 바랐었는데 아직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 대신에 오늘 부활절 예배는 가급적 많은 성도님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특별히 실시간으로 중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그동안 실시간으로 예배를 중계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준비된 장비에도 한계가 있었고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설비의 투자를 하기에도 불확실 했고 최소한의 장비로 실시간 전송을 하는데에는 아직은 기술적인 문제들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또 실제로 실시간으로 예배 영상을 송출하려다가 문제가 생긴 교회들도 있었기 때문에 예배 후에 영상을 편집해서 올려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모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술적으로 간소화된 방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서 불안정성의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기자재가 없이도 간편하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서 오늘 부활주일 예배는 실시간으로 함께 드리는 것을 시도해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일종의 예행연습으로 매일 저녁 8시에 고난주간 기도회를 실시간으로 가져보았고 그러면서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확인할 수가 있어서 오늘은 이렇게 주일 예배를 실시간으로 중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 실황 중계의 결과를 보고나서 앞으로 계속 할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지금 실시간 영상으로 예배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혹시 다소간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이지만 올해는 매우 특별한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탄절도 아닌 부활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믿는 사람들이 부활절을 어떻게 지키는가 보자 하고 관심을 가졌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부활절의 신앙적인 의미보다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이 조금 진정세에 접어든 것 같은데 부활절이라고 그동안 자제하던 기독교인들이 다시 모여서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되기라도 할까봐 염려하면서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배려하면서 우리 교회도 올해 부활절은 특별한 행사 없이 간소하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들은 그렇게 부활절을 보낸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부활절 날짜를 옮겨서 지키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그런 교회들의 생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탄절도 아닌 부활절의 날짜를 옮기는 것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대부분은 성탄절을 12월 25일이 아닌 다른 날에 기념한다는 것이 더 어색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반면에 부활절은 해마다 날짜가 다르니까 올해는 좀 다른 날로 옮겨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불교계에서 부처님오신날을 한달 연기하기로 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부활절도 연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것같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부처님오신날을 언제 기념하느냐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워낙 인도사람들이 역사와 시간에 대한 관심이 독특해서인지 전승에 따라 언제 부처님 오신날이 무려 400년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남의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이건 제가 그냥 어디서 듣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국대학교에서 나온 불교학개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하게 인용을 하자면 우리나라와 중국 등 북방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전통적으로 기원전 1027년으로 생각하는데 인도와 스리랑카, 태국 등 남방에서는 기원전 624년으로 정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백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통일을 하자고 해서 기원전 624년으로 정하게 된 지 이제 한 50년 정도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가 언제인가 등의 문제로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몇 년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불교하고 아예 차원이 다르니 비교할 수는 없고 그러니까 부활절 날짜를 옮기는 문제를 불교를 따라할 것은 아닌 것이지요. 

게다가 탄생과 부활은 그 의미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탄생한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은 실제로 부활이 일어났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부활절의 날짜가 매년 달라지는 이유 자체가 부활절을 기념하는 날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는 니산월 14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달력이 일종의 음력이었기 때문에 해마다 유월절을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날에 기념하게 되었고 그래서 부활절도 그에 따라 해마다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날이 금요일이었고 예수님은 삼일째 되는 날, 즉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인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초대교회로부터 일요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경축하며 주님의 날, 즉 주일이라고 불러왔고 이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날로 삼아왔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유대교의 유월절이 지난 후 가장 가까운 주일에 지키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었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첫 번째 주일로 이미 4세기부터 확정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부활절의 날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확신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그 정신, 그 의미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언제 기념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언제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절에는 그래도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모여서 경축하고 싶은 마음도 소중한 것이고 부활에 대한 믿음만 확실하다면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올해 부활절을 옮겨서 기념한다고 해서 그것가지고 크게 뭐라고 하시지는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로서는 성도님들이 어디에서든지 이날 함께 부활의 의미를 새기며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부활절이 특별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도 있고 날짜의 변경 논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부활 신앙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불안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나약한 지, 또 그동안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라들의 보건체계가 뿌리채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만들어온 문명과 제도라는 것도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절감을 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인간의 육신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라는 바벨탑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만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부활하시고 죽음의 권세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더 소중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첫 번째 부활절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날은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날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요일로 말하자면 일요일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닌 그 다음날을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 기념하며 이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고 앞으로도 또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이유는 일종의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으로서의 안식일을 지키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날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경배하는 날로 소중하게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날 이른 아침에 세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따라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따라 갔을 만큼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 전날 돌아가셨고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안식일 전에 장례를 마치기 위해 급하게 장례의 절차를 치르는 바람에 충분히 예수님의 시신을 예를 다해서 모시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무덤을 찾아 갈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 여인들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장례를 지낼 때에 시신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므로 존경과 애도를 표현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런 절차를 생략해야 했기에 이제라도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조금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돌아가신지 이틀이 지나서 시신을 대하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 되겠지만 이 여인들은 그런데 개의치 않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그곳에서 흰 옷을 입은 청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여인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두었던 곳이 비어있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흰 옷을 입은 청년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실터이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도망가고 흩어졌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시 보기를 원하신다는 용서와 축복의 말씀을 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이 여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또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전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자면 박혁거세와 고주몽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는 그야말로 신화와 전설이 난무하던 시대이니 사람들이 무지몽매해서 부활을 믿었지 현대의 과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이라고 무턱대고 무엇이나 다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어느 세계에나 일정한 사후세계에 대한 공동의 신념이 존재합니다. 그 신념의 내용에 속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신념과 배치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 그리스, 로마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영혼불멸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은 더럽고 추하고 불완전하며, 영혼의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죽음은 자기와 같은 철학자들이 평생 추구해오던 바라고 말하며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같은 거룩하고 위대한 인물이 죽었다가 다시 육신을 입고 살아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었던 부활은 최후의 심판날에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모두 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부활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부활과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는 여인은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보내실 구원자, 그리스도,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승리를 가져 올 것이지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다 흩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앞에 계신 분이 누구신줄 모른 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이라고 믿었었는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믿음을 저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여러 번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믿고 따르던 여인들도 전혀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심리적으로 그런 체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앞으로 가져올 변화들에 대한 여러 가지 예측과 분석에 대한 글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계에서도 앞으로 교회와 신앙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느 목사님의 매우 신랄한 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재난의 때에는 다른 종교도 그렇겠지만 교회는 좀 세속적인 표현을 쓰자면 흥행에 성공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 의지하고 신앙을 통해 위로를 받게 하기 때문에 교회로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확히 그 반대라고 합니다. 이 재난의 때에 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흥행에 실패를 하고 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목사의 설교에서 위로를 찾기 보다는 질병관리본부장의 발표에서 위로와 희망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매우 도전적인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과학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고 오직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회적 거리두리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합니다. 교회도 그런 지식을 거부할 수 없고 우리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시대에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학적인 지식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지금 가장 과학적이고 냉정한 분석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을 수 없고 다만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현상은 언제든지 재현, 재발될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으로 70%의 사람들이 감염이 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지난달 26일 발표된 영국의 임페리얼 칼리지의 연구는 최악의 경우에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염되고 감염된 사람들 중에 4000만명의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고 최선의 방역을 했을 경우에도 186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석은 지금 세계 도처에서 현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비율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나라 인구수가 전세계 인구의 1%가 좀 못되기 때문에 최선의 경우에도 1만명이상이 사망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 과학적인 지식과 필연성에 근거한 느슨한 방역 정책을 취하던 선진국들, 과학적 지식이 충만한 나라들에서는 매장할 곳을 찾을 수 없을만큼 수많은 사망자들이 연일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소중한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에 내어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분투가 있는 곳에서 사망의 권세에 맞서며 지금도 많은 생명을 구해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는 경험과 통계를 통해 습득한 지식의 세계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통계를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확률을 계산하고 예측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사건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 속에서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통계가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신념과 믿음과 가치의 세계입니다.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곳에서 생명이 죽음에게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 신념의 근거를 발견합니다. 결코 죽음은 생명의 능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고 그래서 우리는 싸우고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애통해하며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시신을 향기롭게 처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죽음이 정복된 것을 보고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혼돈, 바로 그 낯선 세계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믿고 생명을 구원하는 싸움을 지지하고 힘을 보태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는 것은 과학의 법칙의 세계입니다. 인정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믿음과 은혜의 법칙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혼돈과 불확실의 세계를 거부하고 익숙한 계산과 확률의 세계에 머물기 보다 그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고 그 불완전함 속으로 들어가서 예측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고 계산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 여인들은 혼돈과 두려움의 세계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떨림은 그 여인들에게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죽음이 지배하는 육신의 세계에서 생명이 지배하는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혼돈과 두려움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활은 일어날 수 없고 그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서 헛소문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지켜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지금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믿음과 도전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계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 미래를 우리의 믿음을 통해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의 균열이며 혼돈입니다.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몰아넣고 우리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을 뒤흔듭니다. 우리는 성경이 전해주는 부활의 증언 앞에서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내게 익숙한 세계, 상식과 통계와 확률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여주는 생명의 권능을 믿고 영원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던 여인들은 이전에 알던 세계를 부정해야 하는 혼돈과 두려움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이 놀라운 은혜의 사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죽음의 어두운 권세가 퍼져나가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증거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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