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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의미 / 출애굽기 20:1-3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대부분 영역이 불황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소위 특수를 누리는 분야들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IPTV, 케이블TV 그리고 넷플릭스 등의 경우에는 오히려 시청자 수가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밖으로 잘 나다니지 않으니까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늘게 되어 반사 이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요즘 종종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는데 보신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안 보신 분들은 무슨 저런 드라마가 있나고 하실 수도 있으실텐데 지금부터 한 2년 전에 방영이 되었던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름 그대로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불운한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이 감옥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서도 계속해서 범죄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갱생의 삶을 살아보고자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와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감옥이 우리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특히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가 죄인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누가 판단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죄인이라는 말을 자주하지만 어쩌면 너무 쉽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라고 하는바람에 정말로 죄에 대한 자각과 죄의 심각성이 무뎌지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새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소위 교정사업을 합니다. 사람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정한 처벌을 가해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리고 출소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형기가 남아있는 같은 감방의 동료들은 늘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일종의 교정사업을 합니다. 실정법을 위반 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죄인인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게 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회개를 하자면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무엇이 죄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과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6월 마지막 주일까지 십계명에 대한 강해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6월 말까지 모두 11번의 주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서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한 주일에 한 계명씩 십 주간을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잠깐 십계명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원래 양육의 틀을 잡으면서 그동안 성경개관과 함께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양육의 기본 축으로 삼아왔습니다. 성경개관이야 교회에서 당연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덛붙여서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즉 믿음의 본질을 정리한 것이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가, 즉 우리의 소망에 대한 가르침이고 십계명은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치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요약해 주셨듯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즉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이 세가지 말씀은 신앙의 중요한 세 가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며 또한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신앙의 교육에서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에 대한 해설과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으로 돌아가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에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의 해설을 그들의 가르침과 저술의 기본적인 틀로 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양육과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기본 공통 과정으로는 성경개관,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공부하는 성경공부를 실시해 왔고 사역훈련으로 각자의 사역에 따라 제직교육, 교사교육, 선교훈련, 찬양대교육 등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현대교회의 그동안의 기본적인 양육의 틀이었습니다. 사역과 관련된 교육은 각자가 섬기는 사역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지만 성경개관과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은 현대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누구든지 한번은 꼭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성경공부반을 개설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중에 성경공부반을 운영해보니 열심을 가지고 참여하시는 분들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신청을 하시고 시간을 내시지 못하시는 분들은 계속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퇴근후에 오실 수 있도록 평일 저녁반도 만들어보고 주일 오후반도 만들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어서 적어도 한번은 모든 성도님들에게 다 양육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 성경개관은 재작년에 전체 목장을 대상으로 목장모임시간에 전체 목장을 네 개 조로 나누어서 각각 3개월씩 일년 동안 전체 목장의 성도님들에게 강의를 했고 작년 상반기에는 사도신경을 강해했고 하반기에는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한 주제로 주일 낮 예배의 설교시간에 강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올해 봄부터 십계명에 대한 강해 설교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다 하시는대로 3월부터 정부에서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 예배가 대폭 간소화되었고 많은 성도님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주간 적용한다고 했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계속 두주씩 연장이 되어서 벌써 4월 중순이 지나는데도 아직 정확하게 언제부터 완화되는지에 대해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3월초부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일단 매일성경으로 묵상을 하는 진도를 그대로 따라서 3월부터 마가복음을 주일 설교 주제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절까지해서 마가복음이 끝났고 지난 주 월요일부터는 에스겔서의 뒷부분을 묵상하게 되는데 이미 에스겔서에 대해서는 작년 수요예배시간에 주요한 내용 전체를 다룬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대한 강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이 되었고 계산을 해보니 부활절 이후부터 시작을 하면 상반기에 정확하게 마칠 수 있어서 오늘부터 십계명에 대한 강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십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십계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데서 온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혹은 성경과 찬송가 합본을 보면 대부분 바로 겉장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맨 뒷장에는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신경, 주기도문은 다들 외우고 있어도 그리 많지도 않는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십계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십계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데서 왔다는 지적의 의미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변화하지 않고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무엇이 죄인지,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지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없고 그래서 진정한 회개도 없고 그래서 진정한 변화도 없어서 이 세상 속에서 별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사실 교회에서는 죄인이라는 말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에 대해, 죄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토대를 놓은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라고 가르쳤지만 그러나 결코 율법이 무용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모두 십계명이 핵심이 되는 율법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아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 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률의 기능과 유사한 것인데 세상의 권력이 법을 집행하여 이 세상을 죄로 인한 무질서로부터 일정부분 교정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다시 죄악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지가 십계명과 율법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고 또 분명한 요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제는 회개이고 요구는 거룩한 삶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곳에는 용서의 은혜가 없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징벌보다 용서가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기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것이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이야기입니다. 장발장은 19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해서는 자신이 억울하다고만 생각했지 전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지만 은 촛대를 훔친 자신을 용서해 준 뮈리엘 주교의 사랑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중요한 것이고 십계명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고 또 그동안 양육과정에서도 하나의 축으로 배움의 시간을 가져왔지만 올해 바로 십계명 강해를 시작하지 않고 미뤄 온데에는 앞에서 말씀드린 상황적인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설교가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여러 가지 차원의 이유가 있는 것인데 먼저는 사실 잘못하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누가 모르겠습니까? 게다가 성경공부반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한 주제에 대해 2시간 정도를 공부를 하니까 관련된 성경구절들도 다 찾아보고 여러 가지 관련된 주제들을 확장적으로 설명하면서 진행할 수 있지만 설교라는 틀안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한 가지 계명씩 다루게 되면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하는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그냥 살인하지 마세요 하면, 네 저는 살인하지 않습니다. 하면 끝나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생명 존중이라는 주제를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피할 수 없는 논쟁적인 주제들이 있습니다. 바로 낙태와 안락사, 자살, 사형제도 등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생명의 시작과 끝에 대한 정의, 생명의 주권, 누가 생명의 끝과 시작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매우 깊은 성찰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질문과 토론이 없는 일방적인 설교로 감당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윤리적,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이 되면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제에 따라서는 매우 민감한 이념적인 입장까지 건드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왜 그렇지 생각하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아예 좀 더 대놓고 민감한 주제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생명에 대한 문제는 좀 복잡하고 심오해보이지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자명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도둑질입니까 하고 묻기 시작하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자본주의를 기본적인 경제적인 원리로 존중하는 분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많은 세금을 걷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도둑질이 됩니다. 자기가 일해서 벌지 않는 것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사회는 타락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의 입장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을 주지 않는 것이 도둑질입니다. 부자가 부자가 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몫을 부자들이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특히나 주일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자 목장에서 토론을 해보세요라고 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성도들 싸움 붙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런 주제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은 목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만 목사가 나와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뿐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나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그래도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윤리적인,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할 때에는 아무리 성경구절을 백개, 천개를 인용을 해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잘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오직 비판적이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이런 문제에 대해 특별히 절감하게 되었던 계기가 있습니다. 벌써 여러해 전인데 소위 무상급식 문제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담임목사님이 암 치료를 위해 요양중이셔서 부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로서는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각자 다른 결론을 내릴 자유는 있겠지만 적어도 성도로서 성경적으로 어떻게 사고를 해야하는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성경적인 원리는 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나름 열심히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다른 목사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셔서 유사한 주제의 설교를 몇 주 상관에 여러 목사님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사도 자기 나름의 성향이 있겠고 그런 것이 설교를 통해 드러날 수 있겠지요. 그래도 제가 듣기에는 다른 목사님들도 다 성경을 통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나름은 공정하게 설교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성도님들의 반응을 보니까, 음, 그러니까 아무개 목사님은 무상급식을 지지하고 아무개 목사님은 반대를 하네...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저는 목사로서 일종의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설교를 전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구나, 그저 한 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구나. 그렇다면 그런 설교를 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십계명과 같이 현실과 직결되는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빼고나면 할 이야기는 여러분 도둑질 하지 마세요. 네 저는 한번도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네 잘 하셨어요. 이런 이야기 말고는 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 계획은 올해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었지만 자꾸만 주저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겠지요?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아니면 괜한 이야기를 해서 결국 성도님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고 성도님들 사이에 관계만 더 나쁘게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결국은 결단을 하게 된 계기는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아니 전 세계의 교회가 그동안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주일성수라는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배란 무엇인가,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성경적인 온전한 예배인가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 대한 강의를 수요일에 영상으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인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바로 주일성수와 예배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 말씀드린 생명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배가 타인에 대한 생명의 존중이라는 문제와 연관이 되어버리는 것은 정말로 그동안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는 왜 기독교인들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확산되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데도 예배를 강행하느냐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어떤 근본적인 성경적인 원리를 찾아보려고 하면 바로 그 답을 십계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 자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에 총선을 치루고 그 결과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여러분들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산더미일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그런 문제를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불편해지고 마음만 상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왜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성경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믿는, 아니 적어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 결론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불편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보다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를 더 믿고, 성경보다 국부론이나 자본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니 그런 이론적인,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해도 어떤 나라가 더 좋은 나라이고 어떤 정책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영적인, 신앙적인, 성경적인 근거들에 대한 관심보다 경제적인, 현실적인, 경험적인 관심에 더욱 경도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가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고,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는 없습니다. 또 그런 관심들이 무익하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우리의 삶에 유익하기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고 우리가 성경을 읽는 사람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그래도 구하며, 구하고자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 내가 펼치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깊은 신앙적 성찰을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결론을 내리면서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다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기기에 어쩌면 같은 성경을 읽고도 어느정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과 내가 결론을 내려놓고 성경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문제의 답이 맞는지 틀린지에만 관심이 있고 어떤 근거로,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답을 도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교육전문가들이 강조를 해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장이 다르면 신앙도 상관이 없고 아무리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당연하다면 우리가 굳이 이렇게 주일에 시간을 내어서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영상을 보고,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이 무엇인가를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여러 다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나름 경청하고 공부를 해보면서 한 동안은 똑 같이 예수를 믿어도 주장하는 바가 다른 것은 성경 안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결론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고 생각하고 최대한 그렇게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 수천년의 역사 동안 씌인 매우 거대하고 위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어떤 고전이라도 가지고 있는, 아니 그 이상의 깊이와 넓이가 있고 그래서 생각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정말 그 말 그대로 수박 겉핥기로밖에 알지 못하고 충분히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요즘 책을 읽고 글을 읽고 또 SNS 등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면서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성경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으며 성경 말씀에 경청하고 삶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서로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분들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신중하며 사려깊고 배려심이 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놀랄만큼 일관성이 있습니다.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결론들을 내리곤 하지만 그 차이가 생각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결론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충분히 성경의 말씀을 경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성경을 알고 경청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좀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가끔 희한한 경험을 하는 것이, 실제로 만나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삶의 실천이 별로 다르지 않는 사람들이 소위 이념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서 생각을 표현할 때면 좀 더 격해지고 극단적이 되는 것 같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고 다 양심적으로 살고자 하고 성실하게 자기 영역에 최선을 다하는 전문인들이고 다 생활비를 아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 이 나라가 더 발전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왜 이념적인 문제들과 연관되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마치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인 것처럼 서로 비판적이 되고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어떤 때는 페이스북에서 일부러 친구를 끊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닌데, 훨씬 더 따뜻하고 훨씬 더 원만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글을 쓰고 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가 하며 마음이 상하게 되는 때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아는 사람의 글을 보지 않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성경적인 언어에 익숙하지 않고 이념적인 언어에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치를 성경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다른 이념의 틀을 빌려와서 표현을 하게 되기 때문에 원래 우리가 가진 생각들이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앞부분에는 신앙적인 원리들이 나오기 때문에 좀 덜하겠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때로는 좀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저를 신뢰하지 않으셔도 좋지만 성경은 신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우리 인생의 답이 있고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답이 있다는 믿음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앞으로 한 주제 한 주제 다루게 되면서 어떤 답을 드리기 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자명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가지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의 죄와 나의 욕망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의 생각을, 나의 가치관을, 내가 자명하게 생각해왔던 삶의 원리들을 부정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성경을 읽고 성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좀 불편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아주 죄송하지만 저나 여러분 모두 우리가 사실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그렇게 충분하게 순종하며 살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우리에게 낯설 수 있고 우리에게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가 살고 그래야 이 나라가 살고 그래야 온 세상이 살 수 있는 진리의 음성을 미세하게나마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바른 길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좀 더 사랑하고 이웃을 좀 더 사랑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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