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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 / 사도행전 11:19-26

지난 수요일에는 처음으로 저도 온라인으로 비대면 예배를 드려보았습니다. 수요예배의 경우에는 한 달에 한 번은 제가 설교하지 않고 부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시는데 대개 마지막 주 수요일에 그렇게 합니다. 지난 주가 제가 설교하지 않는 주여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기 위해서 제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려보았습니다. 찬송도 따라하고 기도하고 설교도 들었는데 처음에는 볼륨도 제가 조절할 수 있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집중이 잘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서 손이 가게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없으니까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아, 설교를 길게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어느 교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목사님이 요즘은 성경공부나 다른 양육시간이 부족하니까 주일예배 설교가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한시간씩 설교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좀 설교가 긴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려서 40분으로 줄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교회 목사님은 한 시간 안에 모든 예배 순서를 마치기로 해서 설교를 딱 17분을 하신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요즘 대세는 설교를 짧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테드(TED)라든가 온라인에서 하는 강연들이 많은데 보통 시간을 15분에서 20분 사이로 잡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 사람들이 집중하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결론은 설교 시간은 조금은 줄여보아야 하겠다는 것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온라인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다보니까 설교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온라인이라는 낯선 상황 속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지도 벌써 여러 달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 경험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 예배의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우리의 삶과 신앙에 질서를 잡아줄 수 있는 것인데 이렇게 한두, 두주 단위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지침이 바뀌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는 입장에서는 참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늘 드는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방역정책에 협조하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만 특별하게 더 제약을 많이 받는 것 같고 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세상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한 심정입니다.  

그러면서 요즘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설교를 하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 초대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초대교회라고 할 때에는 넓게 보면 사도행전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략 4세기 초까지, 그러니까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 기간동안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믿는 신앙이었고 로마제국의 일반 시민들에게는 낯선 종교였습니다. 이 시기는 박해의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로마제국이 적극적으로 기독교롤 박멸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기에 따라 박해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는데 간헐적인 박해가 300년 정도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첫 번째로는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하고 또 로마제국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종교적인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당시에 기독교 신앙은 일반적인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고 그것이 적극적인 박해가 아니라고 해도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게 되었던 원인이 되었고 또 그래서 박해를 정당화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교회의 아버지, 즉 교부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이면서 또한 일종의 초기의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가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그들이 믿는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교도들의 신앙에 비해서 어떤 면에서 더 탁월한 것인지를 논증하는 글들을 많이 저술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가 정립되었을뿐 아니라 또한 이러한 당시의 저술들을 통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우리가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은혜로운 글들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신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쓰인 글들을 읽는 것은 소홀히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수요예배시간에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의 핵심적인 저술들을 읽어본 적이 있고 양육과정을 통해서 현대의 신앙서적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앞으로 시간이 되면 초대교회에 쓰인 글들은 성도님들과 함께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한된 시간에 많은 내용들을 전해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받았던 인상을 말씀드리자면 먼저 그 시대에도 많은 서신서들이 작성이 되었는데 교부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마치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성경의 내용과 어투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읽고 이해하고 있어서 그들의 글 속에 성경의 내용은 물론 분위기와 문체까지도 그대로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논증적인 글들의 경우에는 성경은 물론 당시 로마시대에 유행하던 그리스 철학과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탁월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논증하고 증언하는 목소리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증언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최근에 기독교 신앙과 예배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상황 속에서 막연히 불만을 가지고 불평을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이 시대에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삶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최근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교계 안팎의 상황들은 이 시대를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 부정적인 면에서 그렇습니다. 일단 기독교인의 숫자가 정체를 넘어서 확연한 감소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1일 주간에는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장로교단들의 총회가 있는 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교단마다 교세 통계를 집계해서 발표를 했는데 우리 교단의 경우는 약 260만명 정도 됩니다. 그 숫자에도 여전히 거품이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제가 2008년에 총회에서 일할 때에는 300만 성도운동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다시 전도에 열심을 내자고 캠페인도 벌였고 그래서 300만명을 달성했다고 결과를 보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10년이 좀 더 지났는데 오히려 40만명이 줄어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세대의 구성면에서 보면 더 심각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대략 우리나라의 개신교 인구가 20% 정도 되는데 아마도 5-60대 이상의 세대에서는 30%가까이 되겠지만 2-30대 밑으로 가면 10% 혹은 그 이하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캠퍼스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대학생들 중에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학생들을 5% 정도로 본다는 이야기를 벌써 오래전에 들었고 중고등학교에서 교회다니는 아이들이 한 반에 두세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요즘 목요일마다 선교지 이야기를 선교사님들을 초청해서 나누고 있는데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한국도 선교지가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한 세대 안에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비율이 한 자리 숫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이 믿는 낯선 신앙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꼭 비관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의 가치를 입증하고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다음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에 교회가 익숙해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 몇 가지 질문들을 스스로 해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정말로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앙인가? 특히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은 이 사회에 진정으로 유익한 가치관을 제공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내 자신의 인격의 성장과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독교 신앙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의 가치를 설명하고 전수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믿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어떻게 나의 삶을 통해 증명해보이고 깨우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해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점검을 해보고 정리를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그들의 노력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아직 사람들이 기독교가 어떤 신앙인지 알지 못했던 시대였고 그래서 기독교가 어떤 신앙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나 철학과 비교해서 더 탁월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에 비해 더 높은 도덕적인 표준에 따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글로써, 삶으로써 증명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심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장 높은 도덕적인 표준을 제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아 순교자의 길을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인생의 자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게 된 배경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곱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의 순교와 이후에 이어진 박해로 당시에 주로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복음이 더 넓은 지역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도들이 아니라 무명의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전도에 의해서 안디옥이라는 이방 도시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당시에 기독교계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파송해서 교회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회심 후에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바울을 찾아가서 그와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가 장차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해 파송하는 이방인 선교의 모태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안디옥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정을 가진 사람들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을 관찰하는 외부인들이 보기에 서로 민족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인 이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며 세상을 향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더 선호합니다. 사실 기독이라는 말이 본래 중국어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고 기독교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영어로는 크리스찬이고 다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말의 뉘앙스로 보면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더 잘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때에 교회의 주류는 유대인들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그런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들의 유일신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신앙이 모순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앙을 후대에 교리화하면서 삼위일체 신앙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들이 스스로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으로 여기기보다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땅의 어느 민족,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 소속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소속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와는 달리 어느 민족,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든지 구분이 없이 온 세계로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도 자료로 실어드렸는데 2세기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스라는 한 로마의 고관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보면 상당한 깊이가 있는데 자기 스스로 누구인지를 서신에서 밝히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이 편지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을 연상시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고관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교회가 시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경우에는 아예 첫머리에 “데오빌로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디오그네투스라는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 요약해서 전해주고 있는 서신인데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들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이국인으로서 삽니다. 그들은 시민들로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로서 모든 것을 견딥니다. 모든 타국이 그들의 조국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조국이 타국입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결혼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낳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식탁을 서로 나눕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부 침상은 서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 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신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위에서 바쁘게 삽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제정된 법률을 지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삶 속에서 그들은 법률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능가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무명인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유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들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살려집니다. 그들은 가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완전히 빈곤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부유함을 누립니다. 그들은 치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치욕 가운데 더 영예를 얻습니다. 그들은 중상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백함을 입증 받습니다. 그들은 욕을 얻어먹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축복합니다. 그들이 모욕을 당할 때 그들은 여전히 정당한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이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로 형벌을 받습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살려지기에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외국인들로 적들로 취급당합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의해서는 추적당합니다. 시종 그들을 몹시 싫어하는 자들은 그들의 적의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글에 보면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속해있지만 그러나 이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삶의 원칙으로 따르며 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글이 놀라운 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를 놀라게하고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렇게 배웠고 이렇게 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많이 오염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범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기독교 신앙이 진정으로 어떤 신앙인지를 바르게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어렵게 아들을 유학을 보내서 음악 공부를 시켰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학교에서 자리를 얻으려는데 기부금을 얼마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답니다. 그 말을 들이시고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는 안한다라고 딱 잘라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기에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과는 다른 표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아 내 맘에 새기고 내 삶에 새기며, 이 세상에서 오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이 세상에서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먼저 생각하고, 물질적인 풍부함보다 영적인 부요함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설령 세상이 오해하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스스로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됨을 자랑하고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것에 기뻐하며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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