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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에서 형제로 / 빌레몬서 1:8-18


오늘은 10월 둘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 개인으로서나 우리 현대교회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제가 현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첫 번째 설교를 한지 만 8년째 되는 날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12년 첫 주일인 10월 7일에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제직회가 있었고 저는 10월 8일 월요일에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교회 사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화요일부터 출근을 해서 그 한 주간은 설교하지 않고 예배 참석하면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10월 둘째 주인 10월 14일 주일부터 정식으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만 8년째 되는 주일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교회 44년의 역사 속에서 만 8년째 되는 해를 맞이한 첫 번째 목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를 부르셔서 우리 현대교회를 섬기게 하셨을 때에 제기도 제목은 우리 교회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딛고 더 이상 분열과 다툼이 없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대로 저는 이미 2005년 11월부터 2008년 1월까지 2년 여의 기간을 부목사로 사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아픔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2012년 10월에 약 4년 반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때에 제 주위에서는 현대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하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생각하기에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는 교회에 가는 것은 목사로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목사로 현대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게는 되었었지만 우리 교회가 가진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정신,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교회에 대한 애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현대교회에서 사역했던 기간이 참으로 은혜로운 기간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현대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창립 36주년이 되던 해였고 그때 제가 세어보니 우리 교회를 개척하신 신상길 목사님 이후로 제가 9번째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평균 4년에 한번씩 담임목사가 바뀌었던 것이고 그 중에 가장 오래 계셨던 목사님이 안식년 기간 포함해서 7년 반 정도를 사역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현대교회에 올 때의 1차적인 목표는 만 8년의 벽을 넘는 것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 목표를 달성한 주일입니다.


그리고 더 은혜로운 것은 아무도 제가 지금 몇 년째 사역하고 있는지 세어보시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어제 설교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죽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으로 여러 가지로 부족한 사람이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도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고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켜가려는 성도님들의 노력과 헌신의 모습들을 다시 느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성도님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로서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저하고 현대교회하고 궁합이 잘 맞는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합니다. 그동안 노회나 시찰회 모임에 가면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저 목사는 또 언제 떠나려나 하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고 저를 잘 아시는 선배 목사님들은 뜬금없이 오셔서, 그냥 꾹 참아, 그게 잘하는 거야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뭘 참으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죄송하지만 목사님 교회보다 저희 교회가 더 평안하고 목사님 보다는 제가 더 편안하게 사역하고 있는데요”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로서는 오늘 우리 현대교회 역사에 새로운 작은 이정표를 하나 세운 심정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기쁘고 보람된 날이면서도 또한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 현대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제 자신의 한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순간에 그러한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대면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신학교 다닐 때는 들어보지도 못한 표현들이 일상화되어 버린 이 시대에 앞으로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세워가야 할 것인지 날마다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하지만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욱 절실하게 성도님들 모두의 교회를 향한 사랑과 헌신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원래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이 시점에 기독교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함께 상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사역들을 다시 점검하면서 어떻게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그야말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시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의 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우리 교회는 단기 선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해외선교 사역을 전개해오면서 일정한 성과도 얻을 수 있었고 어느 교회의 단기 선교보다도 현지에 밀착되고 현지인들과 신뢰를 가지고 동역하는 선교의 모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여러 기관들과 신뢰를 가지고 동역하게 되었고 지역 사회에도 기여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을 정립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앞으로 이전과 같은 방식의 단기선교 중심의 선교 사역이 가능할지, 얼마나 효과적일지에 대해서도 원점에서 다시 점검을 해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해외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하겠지만 날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 되어 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제는 우리나라도 어떤 선교지 못지않게 복음을 증거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나라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국내에서의 선교적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역점을 두어야 하는 중요한 교회의 사역은 어떻게 교회에 대한 오해와 비판이 점점 더 심화되는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전파하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특별히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도전을 줍니다.


지난 시간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졌던 자의식과 자부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삽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도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진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초대교회 시기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사의 연구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은혜로운 주제는 어떻게 박해받는 소수의 집단이었던 기독교가 300년간의 박해를 거치면서 오히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일종의 사회사적인 연구,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대교회가 그들이 선포하던 복음의 진리를 실제로 구현한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이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증명되고 있고 그것이 로마제국이 복음화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았을뿐 아니라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오해가 세 가지가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는 것, 그리고 인육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신론자라고 생각한 것은 당시에 다신교적인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함께 섬겼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한분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믿는 신을 함께 섬기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은 기독교의 성찬을 오해해서 생기게 된 반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오해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은밀한 곳에 함께 모여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헛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들 간에 서로 결혼하고 같이 산다는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박해받고 오해받던 공동체에 계속해서 회심자들이 들어오며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구체적인 이유들을 찾아보자면  한편으로는 근거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회를 변호했던 교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의 노력을 변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당시에 교회가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빌레몬서는 바울 서신 중에가 가장 짧은 서신이며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서신입니다. 빌레몬서가 성경 가운데 들어가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초대교회의 실제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가 잘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에는 이 편지의 수신자의 이름을 따서 빌레몬서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실제적인 주인공은 오네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용하다”, “쓸만하다”는 것인데 전형적인 종의 이름 혹은 별명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돌쇠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는데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주인의 돈을 훔쳤든지 모종의 경제적인 손실을 끼치고 도망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도망노예라는 것이 들통이 나서 바울처럼 감옥에 갇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상황가운데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로부터 감화를 받아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회심한 후에 연로한 바울을 잘 돌보고 섬겼고 바울도 오네시모를 아꼈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 곁에 두기를 원했지만 오네시모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회심을 했다면 그가 피해를 끼친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바울은 그의 주인인 빌레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레몬도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을 서로 화해시키는 역할을 자진해서 떠맡기를 원했고 그래서 빌레몬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16절에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오네시모를 그의 종으로만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기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시에 교회가 노예도 하나의 인격으로, 주 안에서의 한 형제자매로 대하는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노예제 폐지운동같은 사회개혁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박해받는 공동체로서 그럴만한 사회적인 역량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서 실제적인 평등을 이루었습니다. 당시에 소외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차별을 받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자유를 누렸고 존중을 받았습니다. 많은 종들을 거느렸던 사람들도 예수를 믿게 되면 회심의 증거로 자신의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경우도 많았고 또 교회에서 재정을 모아서 성도들 중에서 종인 성도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당시에 로마법에서는 신분이 다른 사람들 간의 결혼을 금지했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결혼이 정당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남편과 아내들에게, 종들과 주인들에게 주는 권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글들을 보면서 여전히 남녀 간에, 종과 주인간에 차별이 있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에 그 편지를 남자나 여자나, 종들이나, 그 종들의 주인들이나 함께 한 자리에 모여서 그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들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고대사회에는 없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철저히 구별된 사회였기 때문에 교회처럼 이렇게 남녀와 신분과 인종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교회는 그런 일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레몬이 빌레몬서를 받고 오네시모를 만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의 이름 가운데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로 보내서 교회를 섬기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는데 디모데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된 사람의 이름이 오네시모였습니다. 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서에 나온 오네시모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으로 보아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해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종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어떤 종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한 좀 더 후대인 3세기에 로마교회의 감독 중에 칼리스투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로마교회의 감독을 천주교에서는 교황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원래는 노예였다가 해방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에서 교황이라고 부르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역사에도 이런 사례들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백정이 장로가 되고 마부가 목사가 되는 공동체가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여성들의 지위의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을 읽을 때에 바울이 여성에 대해 열등하게 느낀다는 생각을 받을 때가 있지만 바울서신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이 상당히 활발하게 참여하며 지도적인 역할도 감당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사회는 성비의 불균형이 매우 심해서 성인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100 대 135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영아유기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신생아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아버지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즉 태어난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갖다 버려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아들이 버림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로마시대에 힐라리온이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 힐라리온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참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소. 다들 돌아왔는데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아있다고 걱정하지는 말아요. 우리의 태어날 아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하오. 돈을 받는 대로 당신에게 보내주겠소. 내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다면 남자 아이면 키우고 여자 아이면 버리시오. ‘날 잊지 말아요’라고 당신이 말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잊겠소.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아요.”


이 편지에 참으로 모순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잊겠소”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그 사람이 아무런 감정이 없이 여자아이면 버리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당시의 로마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영아살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변증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아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았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생명을 똑같이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데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존중받는 공동체이기에 일반적인 성비와 반대로 교회 안에는 여성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여아를 버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인구 증가율이 더 높았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노예들과 여성들을 존중했을 뿐아니라 모든 소외되고 어렵게 사는 이웃들을 정성껏 돌보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이며 교부이며 기독교 신앙의 변증가였던 유스티누스는 그의 글 중에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묘사해서 우리가 당시의 예배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글 중에 당시에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 그리고 기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선택하는 만큼 기부합니다. 모금된 것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는 고아들과 과부들, 병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들로 인해 곤란 받고 있는 사람들,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저희 가운데 있는 체류하고 있는 외부 사람들을 돌봅니다. 즉 간단히 말해서 그는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보호자입니다.”


초대교회의 헌금의 일차적인 용도는 고아와 과부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는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보호자”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정의롭고 공정하고 평등한 공동체로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먼저 세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근거없는 오해를 받는다면 이에 대응해서 진실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만한 일들이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모든 주장들은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서로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존중하고 배려하고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룰 때에 말보다 더 큰 소리로 이 세상을 향해 외치며 이 세상이 나아갈 바를 보여주고 교회에 주신 영적인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현대교회에 은혜를 베푸셔서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며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의 모범이 되고 도전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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